장교들 군정연장 데모
1963년 2월 27일, 박정희와 그의 추종세력들은 서울시민회관에서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과 육군, 해군, 공군참모총장과 군부장성, 최고위원들을 모아놓고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손을 들고 엄숙히 선언했다.

그런데 3월 15일 수도방위사령부에 있는 80여명의 장교들이 권총을 차고 최고회의 앞 광장에 서서 군정을 연장하라는 데모를 벌였다.

그 다음날인 3월 16일, 박정희는 4년간의 군정연장을 선언하고 그것을 국민투표에 의하여 결정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로인해 정계는 극도로 혼란하고 소연하게 되었다. 3월말, 국방장관 김성은은 일선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지프차 98대를 몰고 청와대로 가서 군정연장을 지지하는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이는 국방장관과 지휘관들이 그들의 본분을 망각하고 국민을 기만하는 정치 협잡극이었다.

이 두 사건으로 인해 군사정부가 외쳐대던 ‘군의 중립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국내외의 여론은 끊임없이 군정 연장반대를 표명했다. 그리하여 4.8 성명이 나와 약간의 타협안을 보았다.

그런데도 정치지도자들과 국민들은 모두 정치군인들이 군대로 돌아가고 민간인들에게 신속하게 정권을 이양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리하여 1963년 3월 19일 하오 3시 낭산을 위시하여, 이범석, 장택상, 윤보선, 김도연 등 재야지도자들은 박정희를 찾아가 3.16 성명을 무조건 철회하고 2.27 선서에서 말 한대로 민정이양을 실현시킬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재야지도자 구국선언
이때 전 국무총리 장택상은 “구정치인들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3.16 성명을 철회할 용의가 있느냐”고 질문했는데, 박정희는 “때묻은 정치인이 후퇴한다면 3.16성명을 철회할 용의가 있다”는 그야말로 몰상식하고 파렴치한 망언을 했다. 마지막으로 김도연이 “때묻고 국민의 지탄을 받는 사람을 구체적으로 지적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자 박정희는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박정희는 일제시대에는 만주에서, 8.15 광복 이후에는 여수, 순천, 부산, 대구에서 국가와 민족에게 역행되는 일만을 해왔다. 군에 있을 때는 그의 부대에서 후생사업을 하는 자들도 있었고, 눈사태로 부하들이 피해를 입은 일도 있었다 한다. 그러한 박정희가 평생을 국내외에서 항일투쟁을 하고 건국과 반공, 반독재투쟁에 대공을 세운 민족의 지도자요, 정치의 대선배이자 부모되는 분들에게 때묻은 정치인 운운하는 것은 그의 교육수준을 의심케 할 정도였다. 이는 그의 수준과 인격에 관계되는 말이며, 그런 말을 대선배들 앞에서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오만불손하고 몰지각한 자의 망발이었다.

이리하여 3월 22일 종로에 있는 백조그릴에서는 3백여명의 재야인사가 모여 민주구국선언문이 낭독되었다. 이어 군정연장을 반대하고 3.16 성명이 철회될 때까지 계속 투쟁하며 평화적이고 질서정연한 행동을 취한다는 구호의 제창이 끝나자, 낭산을 비롯하여 이범석, 김병로, 윤보선, 이인, 김법린, 박순천, 김도연, 백남훈 등 재야 99명의 지도자들은 선언문에 서명하고 길거리로 나와 시위행진을 했다.

이에 군정당국에서는 4.8 조치가 발표되었다. 안국동 윤보선 자택에서 재야지도자들은 4월 15일 낭산을 비롯하여 김병로, 이범석, 이인, 윤보선, 김도연, 정일형 등 11명의 명의로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4.8 성명에 대해 만족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들 재야지도자들은 공동성명을 통하여 첫째, 군사정부는 3년간이나 3권을 한 손에 장악하고 통치해왔으나, 경제질서의 파탄과 민생고를 가져오게 했을 뿐만 아니라 쿠데타세력의 분열과 국군의 단결마저 약화시켰고 둘째, 이른바 4대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사건, 새나라 자동차사건, 빠징고사건)을 비롯하여 수많은 부정, 부패, 협잡과 사기를 드러내어 무능과 부패상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심화되었으며 셋째, 2.27 선서 이후 불과 2주일만에 군정연장을 강행하려는 3.16 성명을 발표하여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어 강력한 반대투쟁을 유발하게 하였고 넷째, 군정연장을 반대하는 국민여론에 봉착하자 무모한 방법으로 억압하려 하였으나 국내외의 집중공격을 받아 4.8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으며 다섯째, 이같은 조치는 2.18 성명에서 제시한 1963년 8월 15일까지의 민정이양계획에 대한 공약부정이며 민정이양의 확약도 아니고, 국민투표의 철회도 아니며, 민정참여의 포기도 아닌 ‘책략’으로서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라고 천명하였다. 이같은 재야지도자들의 성명에 대해 군사정부는 “연내의 민정이양 방침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만 답하였다.

한편, 5.16 군사쿠데타 직후 5월17일 낭산이 쿠데타를 적극 반대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나서 가능한 한 군사정부가 바른 일을 할 수 있도록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쿠데타세력을 더 지켜보려 하였을 때, 낭산의 맹우이며 방책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해온 우당 허비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낭산 선생! 지키라는 휴전선은 안 지키고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아닌 밤중에 한강을 도강하여 온 군인들은 순수한 군인정신을 갖춘 군인들이 아닙니다. 군사쿠데타로 합헌정부를 몰아내고 탈권한 군인들에게서 민주주의나 국리민복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총칼로 한강을 넘어온 군인들은 민간인들에게 정권을 자진해서 내놓으려고 온 게 아닙니다. 낭산 선생! 나는 오랜 세월 동안 한학과 동양철학을 연구하여 왔습니다. 나는 관상과 사주도 볼 줄 압니다. 박정희는 정상적인 코스로는 지도자감이 못됩니다. 박정희는 귀공자 타입도 아니고, 얼굴에 덕이 없습니다. 박정희는 인자하거나 관대하거나 포용력 등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박정희는 전형적인 독재자형입니다. 절대로 자진해서 정권을 안 내놓을 것입니다. 정권을 안 내놓고 국민을 탄압하면 나중에는 비참해지고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결국 박정희는 독재만 하다가 제명대로 다 못 살고 생을 마칠 것입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