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행과 덕행에 탄복… 조정과 유림이 나서 표창


▲ 감결 부문에서 “쌍취정”이란 이름(원내)이 두 번이나 나온다. 쌍취정은 모정 저수지 곁에 있었던 옛 정자 이름이다.
모정리 광산김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200년 전후의 문서를 살펴보는 도중에 삼효자의 효행과 더불어 효자 김예성의 맏아들인 김구해의 덕행(德行)이 상세하게 기록된 내용을 확인하게 되었다. 당시(1802년)에 조정에서 모정리 김씨 문중으로 보낸 공문인데 그 안에 쌍취정(雙醉亭)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온다(사진 참조). 이것은 필자가 쌍취정이 모정마을에 있었다고 앞서 밝힌 것에 대한 확실한 물증이다. 이 문서들은 당시의 시대상황과 풍속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향토사료다. 그러면 이번에 새롭게 발견된 고문서 내용을 살펴보자.

▲ 표창완문 표지
表彰完文(표창완문)

孔夫子誕降(공부자탄강)
영암군 군서면 茅亭里(모정리)
故孝子金禮聖(고효자김예성)
自幼(자유) 天性純直(천성순직) 早丁外艱(조정외간)?不脫(최마불탈)油滋不食(유자불식)歠粥廬墓(철죽여묘)荐遭祖父母喪(천조조부모상)葬祭廬墓(장제여묘)一如前喪(일여전상)夜則虎自來衛(야즉효자래위)晝則烏鵲巢集(주즉오작소집)距家一嶺之間(거가일령지간)每日定省于母(매일정성우모)山腰成坎(산요성감)

其孫箕陽(기손기양)孝事父母(효사부모)克盡其道(주진기도)父以痢症(부이리증)漸至囑?(점지촉광) 斫指注血(작지주혈)延壽七年(연수칠년)其後丁艱(기후정간)朝夕省墓(조석성묘)
又曾孫在敏(우중손재민)亦天賦之成孝(역천부지성효)薰陶庭訓(훈도정훈)早丁慈?(조정자위)奉事繼母(봉사계모)和顔怡聲(화안이성)克養志體(극량지체)母亦感化(모역감화)丁憂廬墓三年(정우여묘삼년)未幾又遭(미기우조)祖父母喪(조부모상)育年廬墓(육년여묘)與第三人(여제삼인)同室而居(동실이거)終身湛樂(종신담락)一無間言(일무간언)


삼효자의 효행 전국에 소문

표창완문(허가문서) 해석
공부자탄강

▲ 표창완문 내용. 삼효자 김예성, 기양, 재민의 효행과 형제간의 우애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영암군 군서면 모정리 옛날 효자 김예성(1698. 2. 8~1777. 7. 23) 어려서부터 타고난 성품이 순진하고 정직하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상복을 벗지 않고,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미음을 마시며 묘 곁에서 살았다 조부와 조모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치르고 제사를 지내며 묘 곁에서 지내기를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와 같게 하였다. 밤이 되면 호랑이가 와서 지켜주고 낮이면 까마귀와 까치들이 집에 모여왔다. 묘소와 집과는 산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하는데 날마다 어머니를 찾아가 밤에는 이부자리를 깔아드리고 아침에는 옷을 먼저 입었다가 드렸다. 그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던 산의 중턱은 구덩이가 파였다.

손자인 기양(1816.7.23~1886.6.15)은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되 도리를 다 하였다. 아버지가 이질(설사)에 걸려 숨을 거두려 하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입에 흘려 넣어 7년을 더 살게 하였다. 그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침과 저녁으로 묘소를 돌보았다.

증손자 재민(1769.2.16~1806.5.7)도 타고난 성품으로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섬기고 아버지께 학문과 덕행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계모를 받들어 섬기되 얼굴색은 온화하게 하고 목소리는 부드럽게 하며, 몸과 마음에 잘 맞추니 계모가 감동되어 변화하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삼년간 묘소 곁에서 살았으며 조부와 조모가 세상을 떠나자 6년을 묘소 곁에서 살았다.

3형제인 재민·재수·재륭이 한 집에서 같이 살았으며, 죽을 때까지 편안히 즐기고 한 번도 이간질하는 말이 없었다.
<원문 번역 : 청광(靑光) 양광식 강진문헌연구회장/문화재연구소장 2009년 9월 8일>

 

조정에서 세금감면 조치도

完文(완문)

▲ 조선 팔도를 대표하는 유림들의 서명 - 황해도, 함경도, 평안도 도유사들의 서명까지 찍혀있다.
六道議?之餘(육도의진지여) 軫一民失所之慮(진일민실소지려) 西終面 茅亭里 居 幼學(서종면 모정리 거 유학) 金龜海(김구해) 素以意氣之人(소이의기지인) 前後饑歲(전후기세) 捐載周恤之義(연재주휼지의) 鄕黨稱之(향당칭지) 官家知之久矣(관가지지구의) 乃於恩綸之下(내어은륜지하) 不勝感發之心告于官(불승감발지심고우관) 而去二月中旬(이거이월중순) 饑民六百餘口(기민육백여구) 一依官分賑例(일의관분진례) 捐出九十餘石재斗給而分給(연출구십여석재두급이분급) 飯飱而饋餉(반손이궤향) 除役(제역)
甲辰(1784年) 四月 日

 

완문(完文)해석

▲ 조정에서 모정리 광산김씨 문중으로 보낸 공문 - 효자 김예성의 맏아들인 김구해의 빈민구제 덕행을 칭찬하는 글. 그 당시 모정마을은 서종면(서면)에 속해 있었다. 이 공문 내용을 보면 김구해 집안이 엄청난 부호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섯 개 도내의 진휼(賑恤)을 논의한 나머지 한 사람의 백성도 편안히 거처할 곳을 얻지 못한다는 생각에 슬퍼졌다. 서종면(西終面) 모정리에 사는 벼슬 아니한 유생 김구해(金龜海 1718~1799)는 평소부터 어떤 목적을 이루기로 결정한 심리상태가 씩씩하고 꿋꿋했다. 앞과 뒤로 흉년이 들어 곡식을 실어다 두루 구제하여 마을과 서종면에서 칭찬하고 관청에서도 이 사실을 안지 오래였다. 그때 임금이 백성을 도운 이에게 특별히 감사의 글을 내렸다. 마음에 느끼어 밖으로 나타남을 이길 수 없어 나라에 보고한다.

지난 2월 중순에 굶주린 백성 600여명에게 나라에서 흉년이면 백성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는 방법을 따랐다. 식량 90여석(섬)을 내놓아 1말씩 나누어 주니 밥을 짓고, 음식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고, 음식을 나눠주게 되었다.

 

자질구레한 일 면제허가
갑진(甲辰) (1784年 4월 일)
1)완문(完文) < 48행 자수미정 . 367cm>
김구해(1718~1799)가 갑진년(1784)에 곡식 90여석을 내놓아 서종면의 굶주린 백성 600여인을 살린 공으로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일을 면제 해준다는 증명서.
2)풍년다서다도부(豊年多黍多?賦),<19행. 16자 204.5>
풍년에는 기장과 벼가 많다는 부(賦 시몬보다 긴 글)
3)감결(甘結) <14행 70×31.5>
:조정에서 영암에 보낸 공문
1)서면(西面)의 쌍취정(雙醉亭) 밑에 있는 방축(防築)의 세금 거두는 일
壬戌.1802年 2月25日
2)임술. 1802年 4월 4일 80행. 315×25
<원문 번역 요약: 靑光 양광식 강진 문헌연구회장/ 문화재연구소장. 2009年 9月 10日>
글/사진 김창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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