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서 바다에 비친 달을 보고 ‘큰 깨달음’


   초의선사와 월출산 도갑사

월인당에서 바라본 월출산의 가을 아침
먼동이 터오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툇마루에 서서 동녘하늘의 빛깔을 자세히 살펴보면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어린 시절이나 대도시에서 살고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십년 전 시골로 이사와 살면서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습관을 갖게 되다보니 자연히 일찍 마당에 나가 하늘과 대지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살피게 되고 그러다보니 계절에 따라 새벽 하늘빛이 다르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

여름과 가을을 명징하게 구분지어 주는 것은 바로 아침하늘의 빛깔과 안개이다. 가을이 가까워질수록 새벽 하늘빛이 점점 붉어지고 가을이 깊어 갈수록 안개가 짙어지는 법이다. 처서가 사흘이 지난 오늘, 새벽동녘 하늘이 온통 주홍빛으로 물들면서 먼 산등성이 위로 점점이 흩어져 있는 조각구름들이 석류 알처럼 붉은 색깔로 영롱하게 빛난다. 이 시점이 되면 고요하던 고샅 앞 시누대숲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 댓잎들이 일제히 일렁거리기 시작하고, 이팝나무 이파리들 또한 무수한 떨림으로 스스로를 깨워 초가을 여명을 품어 안으며 우뚝한 그림자를 마당에 드리운다. 그림자를 통해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세상의 물상들이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방식은 모두 똑 같다. 대나무 숲에서 나온 새들 또한 이에 질세라 목청껏 지저귀며 아침을 부르는 그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에 화답한다. 사태가 이렇게 되면 새벽바람은 더욱 거세지고, 그 영향을 받아 어웅한 골짜기 사이에 갇혀 밤새 정지해있던 구름들이 산등성이 너머로 천천히 이동을 시작한다. 그 이동 방향은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보통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향한다.

상견성암으로 통하는 도갑사 죽로차 오솔길
오늘도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오늘은 월출산 산행을 하기로 한 날이다. 찻물을 끓여 누정마루에서 아내와 함께 작설차를 마시며 산행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아직은 어둑어둑한 월출산 능선 너머에서 붉은 아침노을이 무명천에 황톳물이 드는 것처럼 동녘 하늘에 시나브로 번지고 있었다. 그 황홀한 풍경에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카메라를 가져와서 여러 장면을 담았다.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 가을이 여름을 밀치고 사립문으로 걸어 들어오는 풍광을 이렇게 제대로 볼 수 있다니 참으로 상서로운 조짐이로다. 오늘도 틀림없이 즐거운 산행이 되겠구나.” 이 느낌을 오래 붙잡아두고 싶어서 월출산 도갑사로 떠나기 전에 간단한 메모를 남겼다.

“가을은 언제나 감나무 가지 끝에서 오는 줄로 알았는데, 이제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가을은 이미 월출산 너머 새벽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여름을 저만치 밀쳐내고 있었습니다. 여름은 밀려나는 것이 서러운 지 불화산보다 더 붉은 불꽃을 토해내며 산 너머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월출산에서 바다에 비친 달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은 초의(草衣)선사는 잠시 도갑사에 머무르며 수도 정진했다. 도갑사는 신라 헌강왕 8년(880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본래 12암자를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상견성암과 동암 두 곳만 남아있다. 이번에 답사할 곳은 바로 도갑사와 상견성암이다. 사실 구정봉 아래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용암사지에서 노적봉 밑에 위치한 상견성암까지 통하는 좁은 샛길이 있다. 하지만 용암사가 폐사된 후로 발길이 뜸해져서 여름에는 온갖 잡목과 풀이 우거져서 접근하기가 힘들다. 겨울에 나무들이 나신을 드러내면 꼭 한 번 그 옛길을 답사해볼 생각이다.

노적봉 아래 위치한 상견성암
견성암(見性庵)은 원래 하견성암, 중견성암, 상견성암 셋으로 구분되어 있던 암자인데 하견성암과 중견성암은 폐허로 변한 지 오래고,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상견성암만 남아서 선승들의 수도처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현대에 와서 청화스님이 3년 동안 묵언을 하며 수도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중기 때 까지만 해도 여러 스님들이 주석하면서 수도했던 곳인데 지금은 오직 한 분의 스님만 하안거와 동안거를 하고 계신다.

1722년 담헌 이하곤은 호남지방을 여행하고 ‘남유록’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그 기행문에 보면 상견성암에 대한 당시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용암사로부터 갔던 길을 되돌아서 아래로 율령에 이르렀다. 북쪽으로 꺾어 몇 리를 걸어가서 백 길이나 될 듯한 절벽에 나 있는 실 같은 길로 빙 돌아가는데, 지극히 위험스러워 무서웠다. 무성하게 난 대나무가 촘촘히 우거져 제멋대로 이리 가로 막고, 저리 뚫려 더 갈 수가 없었다. 상견성암에 이르니 뒤편에 석봉이 있는데 식규암과 같다. 서쪽에 큰 돌이 깎아 세운 듯 대를 이루고 있으며 노목 몇 그루의 그림자가 어른어른 돌 위에 퍼져있다. 돌 위에 신보가 먼저 올라갔다. 노승 3~4인이 차례로 앉아 있는 모습이 나무뿌리에서 올려다보니 거의 인간세상의 사람이 아니었다. 방이 또한 지극히 밝고 정갈하며, 햇빛이 기름종이로 바른 창에 비쳐 사방 벽으로 돌아가니 흰 눈으로 이루어진 마을 안과 같다. 부들로 만든 자리, 선탑(禪榻), 향로, 경권 등 여러 가지 놓여 있어 그윽하고 맑다. 내가 남쪽으로 와서 이름난 암자를 관람하며 들려본 곳이 수십 곳이나 이곳이 당연 제일이다. 비록 금강산 가운데에 갖다놓는다 해도 결코 영원암(금강산 명경대 근처에 있는 암자)의 진불(眞佛)만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혜정스님은 사람됨이 조용하며 맑고 조심하며 주의함이 있는 것 같다. 나이는 80인데, 용모는 60세 쯤 돼 보인다. 향산(香山)으로부터 바야흐로 여러 스님들과 참선하는 중이다. 시 한수를 남기고 돌아오다가 대적(大寂), 죽전(竹田), 두 암자에 들렸다가 도갑사에 돌아오니 한낮이 되었다.”

한편, 도갑사에서 발행한 안내 책자에는 상견성암에 대해서 이렇게 써놓고 있다.
“비경(秘境), 그리고 신비, 신선의 자리

한번이라도 견성암을 다녀간 경험이 있는 불자나 관광객들은 그 풍광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다. 은은한 달밤에 빛나는 산의 정취, 새벽녘 상서로운 하늘... 그것은 견성(見性)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신비, 바로 그 모습이기 때문이다.”

필자도 “음력 열 사흗날에 견성암 앞뜰에 서서 산등성이 너머로 떠오르는 달을 보지 않고서는 월출산 달을 말하지 말라”는 말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어서, 10년 전에 그 날을 기다렸다가 야간산행을 한 적이 있다. 견성암으로 오르는 길은 일반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월출산 도갑사
도갑사 해탈문과 대웅전을 지나 조금만 숲길로 들어서면 맑은 시냇물이 사시사철 흐르는 홍계골과 용수폭포가 나온다. 이 시냇물을 건너면 바로 왼편에 미륵전이 보이고 앞에는 부도전과 도선국사비가 나온다. 미왕재 억새밭 가는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면 왼쪽으로 무성한 왕대 숲이 자리하고 있다. 상견성암 가는 길은 바로 이 대숲에서부터 시작된다. 대숲 속에 야생 차나무가 널리 분포하고 있다. 이른바 죽로차인 셈이다.

청명한 가을 열 사흗날 달 밝은 밤, 댓잎에 부서지는 달빛을 받으며 이 죽로차 밭을 지나노라면 이미 암자에 도착하기 전에 속세를 떠나있게 된다. 하얀 차(茶) 꽃은 달빛을 받아 더욱 희고, 좌선삼매에 든 선승처럼 꼿꼿이 서 있는 대나무들은 소슬바람에 흔들리며 서걱거린다. 대숲을 빠져 나와 동백나무와 단풍나무가 우거진 샛길을 한 참 올라가면 폐허가 된 하견성암 터와 중견성암 터가 나온다. 길 가에는 옛 스님들이 사용했던 맷돌이 그대로 남아있어 쓸쓸함을 더해준다.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가면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면서 노적봉 아래 호젓하게 자리하고 있는 조그마한 기와집이 한 채 보인다. 바로 상견성암이다. 그 날 밤 상견암에서 보았던 풍광은 안견의 몽유도원도에나 나올 법한 신비스러운 비경이었다.

이곳 견성암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첩첩이 쌓인 산등성이 너머로 멀리 두륜산이 보인다. 바로 초의선사가 완호스님께 구족계를 받은 대둔사와 40년 동안 주석한 일지암이 있는 곳이다. 틀림없이 초의선사도 도갑사에 머무르면서 이 견성암에 자주 들렀으리라. 어쩌면 둥근 달이 안온하게 세상을 품어 내놓던 날, 이곳에서 두륜산 까지 꿈결처럼 펼쳐진 산너울을 바라보다 나중에 자신이 거처할 곳을 은연중에 정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나라 자생 풍수인 비보풍수(裨補風水)를 창시한 도선국사가 세운 도갑사는 예부터 뛰어난 품질의 작설차(雀舌茶)를 생산해 냈던 곳이다. 일주문을 바로 지나 해탈문에 이르는 길 한편으로 야생차가 널리 산재해 있다. 또한 호수 주변의 골짜기와 산기슭 곳곳에도 차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자생하고 있다. 조선 세조 때 신숙주가 지은 시를 보면 당시에 월출산 도갑사에서 생산한 차가 작설차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도갑사의 수미대사가 자신을 찾아온 답례로 이튿날 아침에 시를 한 수 지어 사의를 표했다.

        道岬山溪雀舌茶
                 신 숙 주

   道岬山寺雀舌茶 瓮村籬落雪梅花
   也應知我思鄕意 設及南州故事多

   도갑산 시내의 작설차
   도갑산 절의 작설차와
   독 마을 울타리에 떨어진 눈 속의 매화꽃은
   또한 응당 내게 고향생각의 정취를 알게 하는데
   남쪽 고을에 많은 옛일을 함께 기뻐하노라.

신숙주의 수미대사와 나눈 시와 담헌 이하곤의 기행문 등을 통해 보면 비록 조선시대가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불교를 공개적으로 무시하긴 했지만 유학자들과 고명한 스님들 간의 개인적인 교류는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의선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님 신분으로서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해거도인 홍현주와 같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들과 친분을 나누었다. 조선의 선비들과 스님들은 문집을 낼 때도 서로 발문을 부탁하곤 했다. 우리나라 차의 우수함을 노래한 초의선사의 ‘동다송’(東茶頌)도 유학자 홍현주의 부탁이 인연이 되어 씌어 지지 않았던가? 왕실 또한 마찬가지였다. 도갑사가 가장 전성기를 맞이했던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세조 때였다. 세조 2년에 수미대사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 966칸에 달하는 당우와 전각을 세웠다. 그러면서도 국가의 법(法)은 한양 사대문 안에 승려의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법이 백성들의 삶과 유리되어 따로 노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초의는 이곳 영암의 월출산에서 젊은 시절 일생의 큰 깨달음을 얻었고 그 인연으로 한 동안 도갑사에 머물렀다. 그러나 월출산과의 인연은 그것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월출산은 초의에게 몇 년 후에 있을 또 다른 인연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글·사진=김창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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