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리 안화봉 터에 각종 공공기관 ‘복지타운’ 조성
비석 많았던 ‘빗독거리’, 아파트촌 몰려 인구 밀집해
명당터 안화봉(案花峰)
춘양리는 1구는 수양리·남춘동·오리정마을, 2구는 잠곡동(장굴동)·새터(새태)마을로 구분된다. 며칠째 불볕더위가 계속되더니 가끔씩 내리는 비로 더욱 후덥지근하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리고, 내복은 몸에 끈적끈적 달라붙는다. 길에는 사람들도 별로 보이지 않는 여름날의 오후.
도선국사가 환선대에 올라 이름을 붙였다는 수양리의 안화봉(案花峰) 터에는 보건소, 선거관리위원회, 종합사회복지관, 여성회관, 노인복지회관, 국민건강보험공단 등 영암지역 공공기관이 꽤 많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월출산 국립공원길로 30m쯤 가면 ‘갤러리아’라는 차와 음식을 파는 곳이 나오고 20m를 더 가면 춘양리1구 복지회관이 있다. 이 회관에는 마을 할머니 14~5명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 더위 탓에 일손을 잠시 멈추고 휴식을 취하는 듯 했다. 이곳에서 400여m를 더 가면 개울이 나오는데, 이 하천을 경계로 용흥리와 구분된다.
오리정마을은 조선시대 때 영암관아에서 동쪽으로 5리쯤에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장흥·강진·해남으로 가는 길의 교통요지에 있어, 각 지방의 오일장에 다니는 상인들이 오가며 술과 음식을 먹는 주막이 있어 붐볐던 곳이다. 덕진-방아다리간 우회도로(13번 국도)가 생기면서 교통량이 크게 줄었으나, 지금도 예식장과 식당, 자동차와 농기계정비소 등이 있고 마을 남쪽에는 수년전 장례식장도 들어서 점차 상업지역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남춘동 신사(紳士) 선씨
마을남쪽에 남춘당(南春堂)이라는 정자가 있어서 남춘동(南春洞)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연희아파트와 영암김병원 사잇길을 지나 50m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수양남춘동길’이 나온다. 왼쪽에는 장미화원과 성하서예원이 있고 150m쯤 가면 다시 왼쪽 길(수양남춘동길)은 소로원으로 통한다. 바로가면 좌측에는 그린나이스 아파트가, 오른쪽에는 그린파크 등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 있다.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아파트가 집단으로 들어서 인구 밀집도가 꽤 높은 편이다. 농촌에도 생활의 편리함 때문에 10여년 사이에 빌라 형태의 아파트가 많이 들어선 것이다. 이 주변은 옛날에 비석이 많이 있어서 ‘빗독거리’라고 했지만, 지금은 아파트가 지어져 모두 사라지고 그린마트 옆에 조그만 비석의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아름다운 월출산 자락에 우리의 전통한옥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노인요양시설인 소로원을 지나 200m쯤 가다보니 기(氣)도로가 나오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숲길을 걷는 모습이 무척 행복해 보인다. 울창하진 않지만 곱게 단장된 소나무들이 휴양림에 온 느낌을 안겨준다. 나무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 할아버지 몇 분을 만났다. 전씨라는 분이 먼저 말을 꺼낸다. “이 언덕은 서쪽에서 하늬바람이 불고 남쪽에서 마파람이 불어 아주 시원하지라. 그래서 근처에 사는 노인들이 여름이면 이곳에 모여 더위를 피하지라. 이 마을은 홀로되어 사는 집이 대다수지라. 이제 그분들도 세상을 뜨고 나면 폐가는 더 늘어갈 것이구만.”이라며 한 숨을 짓는다. 또 한 분은 “뉴스에 기름값이 한 통에 30만원을 넘는다고 하니 걱정이여...오늘 한 통이라도 채워놓아야겠어”라며 벌써 겨울걱정을 한다. “물가도 뛰어 오르니 먹고 살기가 점점 힘들어 지만요” 연일 뛰는 물가에 힘들어 하는 노인들의 푸념이 돌아서는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언덕을 감싸고 왼쪽으로 50m쯤 내려가니 천황사지구로 가는 길이 나온다. 소로원 맞은 편 집 앞에는 정자가 세워져 있다. 이름은 정년각(停年閣). 이 마을에 사는 선사차씨(73)가 1996년 공직에서 물러나 퇴임기념으로 세웠다고 한다. 선씨는 “이곳에서 비슷한 연배들이 모여 함께 술도 마시고 장기도 두면서 무더위를 잊었는데, 지금은 거의 다 떠나갔제”라며 아쉬워한다. 젊은 시절의 추억을 물어보았다. “아이고, 말도 못하제. 6·25 무렵에 16살이었는데 의경으로 소집되었어. 그런데 6촌형이 여·순반란 사건의 관련자 중 한명이었어. 이 때문에 경찰에 끌려가서 모질게 맞았지. 반란군은 경찰이라고 죽이려고 해서 도망 다니고··· 엄청 고생을 했제. 요 앞 소로원의 옆 계곡과 남풍리 골짜기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어. 마치 빨래가 널린 듯 했지. 그 때는 사람들이 대부분 흰 옷을 입고 있었거든...” 그는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는 듯 말문을 닫았다.
예외없이 이곳도 6·25동란의 생채기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남은 사람들은 말년을 외로움 속에서 또는 가난의 굴레에 벗어나지 못한 채 오늘도 한 많은 삶의 여정을 꾸려가고 있다. /영암읍 명예기자=최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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