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세(三世)에 걸쳐 효자가 나온 효(孝)의 마을
1608년 좌의정 김국광의 후손인 송죽(松竹) 김익충이 모정마을에 정착한 지 4대째에 이르러 효자가 배출되기 시작했다. 그의 4대손인 예성과 6대손인 기양, 그리고 7대손인 재민이 지극정성으로 부모에게 효를 행하니 그 아름다운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켜 인구에 회자되었고, 호남 각지의 유림(儒林)들이 임금께 상소를 올려 효자문을 내려주기를 주청했다. 이에 순종 임금은 교지(敎旨)를 내려 세 효자들에게 벼슬을 추증하고 또한 효자문을 세워 그 효행을 길이 빛내도록 했다.<교지와 상소문 사진 참조>
효자(孝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공휘 예성(金公諱 禮成)
효자(孝子)
贈 통정대부(通政大夫) 兼 경연 참찬관(經筵 參贊官))
김공휘 기양(金公諱 箕陽)
효자(孝子)
贈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
김공휘 재민(金公諱 在敏)
그가 살아왔던 곳에 붉은 정문(正門)을 받들어 세우나니
다음은 임금이 내린 교지 전문이다. ‘효자정백’이라는 제목이 붙은 교지 전문은 서각되어 효자문 내부 상단에 걸려있다.<사진 참조>
효자정백(孝子旌帛)
用天之道(용천지도) 因地之利(인지지리)
制節謹度(제절근도) 生死以禮(생사이례)
葬貴以禮(장귀이래) 純一其孝矣(순일기효의)
天姿仁善(천자인선)克諧以孝(극해이효)
親濟盡誠(친제진성) 居喪致哀(거상치애)
播譽公黨(파예공당) 騰頌士林(등송사림)
讀此來章(독차래장) 深庸欽歎(심용흠탄)
一尺澹帛(일척담백) 彫官龍香(조관용향)
奉旌其門(봉정기문) 壽名萬年(수명만년)
聖上(성상) 五百三十三年, 甲子(갑자), 二月 日, 朝鮮(조선) 昌德宮(창덕궁)
李王展下(이왕전하) 卽(즉) 正軒(정헌) 特書(특서) 旌(정)
奏臣(주신) 閔泳琦(민영기) 奉臣(봉신)
교지해석(敎旨解釋)
“천지(天地) 자연(自然)의 도리(道理)를 적용하고, 토지(土地)로부터 생기는 이익(利益)으로 인(因)하여 잘 맡아서 쓰기에 알맞게 하되 법도(法度)를 삼가고, 어버이 살아 계실 때는 섬기기를 다하고, 장사(葬事)지내어 보낼 때는 어버이를 떠나보내는 예의(禮儀)를 다 하였다면, 거짓이나 꾸밈없이 한 마음으로 순수(純粹)한 효도(孝道)라 할 수 있다.
타고난 용모(容貌)가 어질고 착한데다가, 효도(孝道)로 잘 섬겨서, 어버이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고, 어버이의 병환(病患)에는 정성(精誠)을 다 하였으며, 산중(山中)에 있을 때에는 어버이를 여윈 슬픔을 다하고, 공공연하게 자기(自己) 이름을 빛내는 것을 마다하니, 유림(儒林)들이 그 공덕(功德)을 일컬어 기리고 있다.
효행(孝行)에 관(關)한 내용(內容)을 읽어보니 깊고 아름다운 내용(內容)에 탄성하며, 한 점의 욕심(慾心)이 없고 깨끗한 마음에 더욱 정(情)이 간다. 조각(彫刻)하여 장식(裝飾)한 뒤 향(香)을 불에 피우면서, 그가 살아왔던 곳에 붉은 정문(正門)을 받들어 세우나니, 오래오래 그 이름이 빛나리라.
성상(聖上) 533年 갑자(甲子) 2月 조선(朝鮮) 창덕궁(昌德宮)에서 사는 이왕전하(李王展下)인 정헌(正軒) 두드러진 일을 특별(特別)히 쓰다.
임금께 신하(臣下) 민영기(閔泳琦)가 아뢰어 칙명(勅命)을 받들어 시행하다.
<원문번역: 청광 양광식 - 강진 문헌연구회 회장/문화재연구소 소장>“
이 효자문의 명칭은 세현문(世顯門)이며 3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지 내용대로 붉은 정문이며 홍살문 전체가 단청되어 있다. 조각이 정교하고 전체적으로 단아하고 정숙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내부에는 <효자정백> 교지와 규장각 학사 민경호가 쓴 <광산김씨삼효자유적후>, 그리고 이승욱이 쓴 <세현문기>가 편액으로 걸려있다. 세현문기에는 당시 세 분의 효자가 행한 효의 행적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계속>
글 / 사진 김창오 편집위원
영암신문
yanews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