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 김씨 집성촌…학문 벗삼아 조상의 향기 물씬


▲ 배롱나무꽃길 따라 모정마을 가는 길
모정마을은 평산 신씨를 비롯한 몇몇 성씨가 모여 함께 살고 있지만 마을 주민 대다수는 광산(光山) 김(金) 씨(氏)이며 전국적으로도 광산 김씨의 집성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김씨 문중에서는 모정(茅亭)이라는 마을 명칭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누가 광김(光金)을 예학(禮學)의 종가(宗家)라고 하던가, 선대(先代)를 고찰(考察)해 보자, 물론 수많은 훌륭하신 분들이 나오셨지만 동국18현(東國18賢)에 모셔져 있는 사계 김장생(沙溪,長生)과 신독재 김집(愼獨齋,集)을 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같이 모셔져 있는 분 중 우암(尤庵) 송시열(宋時列)과 동춘(同春) 송준길(宋俊吉)은 모두 사계(沙溪)님의 제자이시다, 조선상식문답(朝鮮相識問答)에서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님은 사계선생(沙溪先生)은 「우리나라 예학(禮學)에 있어서 용두(龍頭)마루와 같으신 분이시다」라고 하셨고, 위암(韋菴) 장지연(張志淵)님은「이 시대 선비들의 도덕을 이룬 군자를 꼽으라 한다면 단연 사계선생(沙溪先生)을 으뜸으로 삼는다.」고 조선유학연원(朝鮮儒學淵源)에서 밝혔다.

이와 같이 훌륭한 조상님을 둔 덕(德)은 후손에 이어져 지조 있는 많은 문사가 나온 것도 이런 연유가 아닐까? 장부(丈夫)가 세상을 삶에 역리(逆理)도 있고 순리(順理)도 있을 것이니 순리에 맞지 않는 세상을 만난다면 어찌 거스르지 못하겠는가?

이런 용기가 없다면 입신양명에만 눈을 뜨게 되어 결국 세파(世波)에 휘둘리는 게 역대(歷代)의 역사다. 맞지 않는 세상을 만나면 맞춰 사는 것과 잠시 피(避)하는 것이 있을 진데, 낙남조(落南祖) 휘(諱) 익충(益忠)께서는 시대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아무런 인척이 없는 이곳을 찾아 정착하셔서(1608年) 멀리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조그마한 초옥(草屋)을 짓고 몇 번이고 출사(出仕)를 권유하는 집안 형님 신독재, 집(愼獨齋, 集)의 뜻을 뿌리치고 자연을 벗삼아 당신만의 세상을 사셨다. 이러한 뜻이 후손 대대로 전해져 초옥에 담긴 의미에 걸맞게 후손들이 마음을 모아 마을 이름을 모정(茅亭)이라 칭하였다.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 세월은 영원한 나그네
모정마을에 터를 잡고 초옥을 지어 은거한 송죽 김익충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연유로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땅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을까? 먼저 이 분의 세계도(世系圖)를 살펴보면 뭔가 가닥이 잡힐 것이다.

김국광(의정공, 광산부원군·전라도도사, 좌의정)은 김극뉵 - 종윤 - 호 - 계휘 - 김장생 - 김집과 김극괴(4남·경상좌도 수군절도사) - 원윤 - 경 - 대휘 - 홍립 - 김익충으로 이어졌다.

▲ 연꽃이 활짝 핀 원풍정의 여름 풍경
세계도에서 보듯이 의정공 김국광은 모정마을에 정착한 김익충의 6대조이고, 신독재 김집은 김익충보다 6살 위인 집안 형님이다. 김국광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김극뉵은 큰 아들이고, 김극괴는 넷째 아들이었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으므로 김극괴는 수사공파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 5대손인 김익충(1580~1660)<호는 송죽(松竹)>은 1608년에 경기도 화성에서 영암 모정마을로 입촌하여 모정 광산 김씨의 낙남조(落南祖)가 되었다. 1636년에 신독재 김집이 60세 노구를 이끌고 영암까지 내려와 모정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동생을 세상 밖으로 나오도록 설득하자, 김익충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夫天地者(부천지자)는 萬物之逆旅(만물지역여)요, 光陰者(광음자)는 百代之過客(백대지과객)이라. 而浮生(이부생)이 若夢(약몽)하니 爲歡(위탄)이 幾何(기하)오.<무릇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 세월은 영원한 나그네이다. 그런데 덧없는 인생이 꿈과 같으니 즐거움을 누린다 한들 얼마나 되랴?>”

자신이 경기도에서 영암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세상 어디든 사람이 살 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며, 세월은 짧아 순간 지나가니 모진 세파에 섞일 시간이 없고 벼슬길로 나아간들 그 즐거움을 누릴 여유가 얼마 되지 않을지니, 짧은 인생을 책과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며 살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동생의 이 말을 듣고 나서 김집은 더 이상 출사(出仕)를 권하지 않고 조용히 돌아갔다고 한다.(광산김씨 수사공파 족보)

   ‘존양루’ 시를 쓴 의정공 김국광의 후손
의정공 김국광(金國光)(1415∼1480)은 사헌부 감찰 철산(鐵山)의 아들로 1438년 (세종 21)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성균관생으로 뽑혔을 때 황희 정승이 항상 말하기를 김생은 “작게 될 사람이 아니다” 하며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 반드시 의관을 정제한 뒤에라야 공을 보았다고 한다. 결국 김국광은 나중에 황희의 손녀사위가 되었다. 1449년 전라도 도사(현 부도지사)가 되었다. 성균관 사예를 제수받았고, 왕명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 후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469년 (예종2) 좌의정(右議政)에 승진되고 편집중인 경국대전을 집대성하였다. 이 <경국대전>은 조선초의 법전인 <경제육전>의 원전과 속전, 그리고 그 뒤 많은 법전을 통합하여 만든 통일 법전이다.

김국광은 35세가 되던 해인 1449년에 전라도 도사로 임명을 받았을 때, 영암을 방문했다. 이 때 영암의 여러 명승지를 돌아보고 덕진면 영보마을에 있는 연촌 최덕지 선생의 별장인 존양루를 방문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남겼다.

題存養樓(제존양루) 
     金國光(光山府院君 官左相 諡丁靖)

操心迂叟德馨香 조심오수덕형향
文苑當年獨擅塲 문원당년독단장
世上浮沈惟適意 세상부침유적의
美名應與水流長 미명응여수유장

존양루를 제목으로 함 
      김국광 (광산부원군 벼슬은 좌의정 시호는 정정공)

조심하는 오수(연촌공의 자)의 덕이 향기로운데
문원에서 그해에는 홀로 날리었네.
세상의 부침을 뜻에 두었으니
아름다운 그 이름은 흐르는 물과 같이 길도다.

 - 출처 연촌 최덕지(崔德之)의 문집 “연촌유사(烟村有事)”

   네 명의 효자를 배출하여 임금이 직접 효자문을 하사한 마을
모정마을 광김 종손 집안의 한 사람인 송암 김선민(61)씨는 400년 전 송죽(松竹) 김익충이 모정마을로 입촌하게 된 연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광산 김씨가 모정마을로 들어오게 된 계기는 전라도 도사로 부임한 의정공 김국광 할아버지의 영암 방문과 깊은 관계가 있다. 영보마을에 있는 연촌 최덕지의 별장을 들러 시를 남긴 것만 봐도 국광 할아버지가 영암고을 여기저기를 유람하셨을 거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당시 모정마을은 강과 산과 들로 둘러싸인 천혜의 승지였다. 국광 할아버지는 한양으로 돌아가서도 영암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손들에게 자주 이야기 하셨을 것이며 또한 영암에 대해 쓴 글이 대대손손 전해져오면서 후손들이 영암지역에 대해서 관심과 동경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1608년은 선조 임금이 붕어하고 광해군이 옥좌에 오르는 시기인데, 당시 정치 상황이 몹시 불안정하고 혼탁했다. 더구나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전 국토는 대부분 황폐화되었고 인심 또한 흉흉했다. 오직 전라도만이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은둔을 결심한 젊은 선비에게 직계조상의 체취가 남아있는 전라도 영암은 매력적인 장소였을 것이다. 송죽 김익충 할아버지가 초옥을 짓고 모정마을에 정착하여 일가를 이루자 28년 후인 1636년에 집안 형님인 신독제(愼獨薺) 김집(金集) 할아버지가 다시 영암 모정마을을 방문하여 두 형제가 회포를 풀었다. 은둔을 풀고 세상 밖으로 나가기를 권하는 신독재의 뜻을 뿌리치고 자연과 학문을 벗삼아 유유자적한 삶을 사셨다. 그 후 자손이 번창하여 마을이 커졌고 4대손부터 효자가 나오기 시작하여 마침내 임금으로부터 삼효자문인 ‘세현문’을 하사받기에 이르렀다. 서호면 송산리에 있는 효자문까지 합하면 네 분의 효자가 나온 것인데, 이것은 고금에 드문 일이다.“ (계속)

글 / 사진 김창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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