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취정과 석천 임억령

▲ 옛 쌍취정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엄길마을 수래정.
구림마을 출신의 박이화(1739~1783)가 쓴 낭호신사(朗湖新詞)에 보면 쌍취정에 대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요월당 높은 집은 임목사의 랑사로다
연당(蓮塘)의 배를 타고 형제상유(兄弟相遊) 하올시고
강호백발 양령자(兩影子)는 쌍취정이 완연(宛然)하다”

요월당은 임구령 목사의 사랑채를 말하는 것이고, 연당에서 배를 타고 형제끼리 서로 놀았다는 대목에서의 형제는 바로 석천 임억령과 월당 임구령을 지칭하는 것이다. 강호백발 양령자는 두 말할 필요 없이 늙은 두 형제의 쌍 그림자를 나타내는 말이며 쌍취정을 빗댄 표현이다. 충청도 선비 담헌 이하곤이 모정마을 쌍취정을 다녀간 것이 1722년이었고, 박이화가 낭호신사를 쓴 것은 그때부터 60년이 지난 후였다. 이 글을 보면 쌍취정이 1558년 명종 13년에 지어진 후로 200년이 지났지만, 그 때까지도 건재했으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다녀갔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석천 임억령은 쌍취정에서 노닐다가 <쌍취정에 올라>라는 시를 남겼는데 그의 문집인 <석천집>에 실려 있다.

등쌍취정(登雙醉亭)

長勞南北夢 偶把海山杯 (장노남북몽 우파해산배)

萬一君恩報 與君歸去來 (만일군은보 여군귀거래)

天地靑山萬 江湖白髮雙 (천지청산만 강호백발쌍)

一杯須盡醉 綠蟻滿村缸 (일배수진취 녹의만촌항)

小屋如龜殼 秋山以錦文 (소옥여구각 추산이금문)

機心都己盡 吾與白鳩群 (기심도기진 오여백구군)

쌍취정에 올라

남북에서 시달린 몸 우연히 해산에서 술잔 잡는다

군은을 갚으걸랑 그대 곁에 돌아오리

천지에 많은 청산 강호에는 백발이 둘이라

취하도록 마시어라 술 항아리 가득하다

작은 집은 거북 껍질 같고 가을 산은 비단무늬 같네

거짓마음 다 버리고 갈매기와 함께 벗하리라

담양의 식영정(息影亭)과 영암 모정리의 쌍취정(雙醉亭)

▲ 쌍취정터 옆에 지어진 모정마을 원풍정.
옛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가는 일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이다. 그 인물이 뭇사람들의 존경과 흠모를 받았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쌍취정을 오가며 노닐었던 석천 임억령은 조선시대 가사문학을 이야기할 때 늘 그 앞줄에 나오는 이름이다. 여기서 잠깐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석천 임억령(1496~1568)은 해남 출신으로 1525년 문과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가 금산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을사사화(1545)가 일어났다. 당시 동생 임백령이 소윤(小尹) 일파에 가담하여 선배격인 대윤(大尹)의 선비들을 숙청하자 심한 자책을 느껴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후 백령이 원종공신의 녹권(錄券)을 보내오자 격노하여 이를 불태우고 해남에 은거했다. 동생인 임백령과 형제간의 의를 끊으면서까지 정도를 걸으려했던 그의 의기는 후세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552년에 다시 등용되어 동부승지 등을 역임했고 1557년에 전남 담양부사로 임명되었다.

그가 담양부사로 재직 중이던 1560년에 사위인 서하당 김성원(1525~1597)이 담양 남면 소나무 동산에 정자를 짓고 석천에게 머무르도록 했다. 쌍취정이 지어진 때와 비슷한 시기이다. 이 때 서하당의 나이는 35세, 석천의 나이는 64세였다. 서하당 김성원은 광산 김씨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신 효자였다고 한다. 석천의 사위이면서 동시에 제자이기도 했다. 석천은 정자의 이름을 식영정(息影亭)이라 짓고 식영정기를 써서 그 이유를 상세히 밝혔다. 이 식영정에서 송강 정철이 가사문학의 백미로 불리어지는 성산별곡을 지었으며, 송순·김인후·기대승·고경명·백광훈·김덕령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명사들이 자주 모여 시를 짓고 시국에 대한 담론을 나눴다. 지금 담양 식영정은 그 근처에 있는 소쇄원, 환벽당과 더불어 전국의 문학도들과 문화 답사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석천 임억령은 담양의 식영정과 영암의 쌍취정을 오가며 제자를 길러내고, 또한 위에서 언급한 여러 명사들과 더불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담양에서 교류한 선비들이 석천 임억령 형제가 지은 모정리 쌍취정을 찾아와 주변 풍광을 감상하고 시문을 남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쌍취정이 복원된다면 담양의 시가문학권과 연계하여 답사객들의 발길을 끌 수 있을 것이다. 복원된 쌍취정은 원풍정과 쌍을 이루어 그 운치를 더할 것이며, 이들은 또한 이웃 구림마을의 간죽정, 죽림정, 회사정, 호은정과 더불어 새로운 정자벨트를 형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도선국사 전설 탐방로를 따라 걸으면서 운치 있는 정자들을 방문하여 기둥과 편액 속에 깃들어 있는 옛 선현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서호면 엄길마을로 이사간 쌍취정
19세기 초에 선산 임씨들은 모정리 주민들에게 방죽(큰 연못) 곁에 있던 논을 팔고 영암을 떠났다. 그 후 1857년에 임씨 후손들이 나타나 방죽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태가 일어나 마을 주민들과 소송이 벌어졌다. 이 일에 대해서는 다음호에 자세히 상술할 예정이다. 마을 주민인 김학수(92)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후 엄길마을 전씨네가 이 쌍취정을 사서 건물을 뜯어다 이설하고 수래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 엄길마을 회관 곁에 세워져 있는 정자가 바로 그것이다. 일부 사람들이 쌍취정을 구림에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남의 마을의 역사를 함부로 바꾸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품격을 갖춘 고풍스런 정자이다. 그러나 이설(移設)하는 과정에서 쌍취정의 원형이 적지 않게 훼손되고 말았다. 이하곤의 기행문에서 설명된 작은 방도 없어졌고 아이들이 뛰어다닐 정도로 높았던 땅에서 마루까지의 높이도 많이 낮아졌다. 이 과정에서 쌍취정 편액과 문곡 김수항과 같은 문사들이 남긴 여러 시를 새겨놓은 편액 또한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모정리 동계에서는 쌍취정이 있던 자리 옆에 1933년(갑술년) 원풍정(願豊亭)이라는 정자를 새로 지었다. 이것이 현재의 원풍정 12경으로 유명한 정자이다.<계속>
글/사진=김창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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