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취정 복원 '해맞이 관광명소' 활용 아쉬워


만 주의 버드나무와 큰 연못이 있던 정자 - 모정리 쌍취정(雙醉亭)
모정마을에는 현재 3개의 정자가 있다. 원풍정, 망월정, 울춤사장 쉼터가 그것인데 가장 역사가 오래된 정자는 호수 가에 자리했던 쌍취정(雙醉亭)이다. 이 정자는 원풍정을 짓기 전에 서호면에 있는 어느 마을로 팔려갔기 때문에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지금도 서호면의 그 마을에 가면 이름만 다른 옛 쌍취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시 지으면서 원형은 다소 바뀌었지만. 모정마을 주민들은 앞으로 저수지 주변을 수변생태공원으로 조성하고 둑방길을 살려 산책로가 개설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이 호수공원에 옛 시인 묵객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쌍취정을 복원하여 원풍정과 더불어 달맞이, 해맞이 명소로 활용하면 훌륭한 문화관광 자원이 될 것이다. 사실 쌍취정(雙醉亭)은 옛 선비들이 남긴 시나 기행문에는 나오는데 그 정확한 위치를 잘 몰라서 관심 있는 분들이 궁금해 하는 정자이다. 그래서 잘못된 추측으로 엉뚱한 곳을 쌍취정이 있던 곳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이번 기회를 통하여 쌍취정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자리 잡게 되기를 기대한다.

호수 가에 자리한 모정마을 쌍취정(雙醉亭)
▲ 쌍취정 터에서 바라본 호수와 월출산 전경.
여러 해 전, 영암문화원에서는 영암을 노래한 한시나 문장을 한글로 풀이해 놓은 책자(영암의 고문학)를 한 권 발간했다. 이 책 내용 중에 쌍취정에 대한 시와 기행문이 나오는데 정자의 위치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냥 “쌍취정 - 서쪽 이십 리에 있었음. 현재는 없다. 임억령의 형제가 세웠다 한다.”고만 씌어있을 뿐이다. 다음은 이 책에 나오는 임호가 지은 쌍취정이라는 제목의 시이다.

쌍취정(雙醉亭)
林浩(임호)

滿目黃雨十里平 만목황우십리평
賓鴻將子叫秋聲 빈홍장자규추성
仙人往事尋無跡 선인왕사심무적
雙醉當年友愛情 쌍취당년우애정

누른 비 십리평야에 질펀하다
기러기는 가을 소리를 알리는 구나
옛 사람 지난 일을 찾으니 자취 없고
둘이 취한 그 때의 우정은 어디 있는고
- <영암의 고문학(古文學) / 영암문화원>

조선 중기의 화가이자 평론가인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의 쌍취정 답사
그리고 같은 책 말미에 보면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이라는 분이 호남 지방을 여행하고 쓴 기행문 중 쌍취정과 관련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경주이씨 이하곤(1677~ 1724)은 충청도 진천 사람으로 1708년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는 별로 뜻이 없어 일찍 고향 진천으로 내려가 학문과 서화에만 힘썼다. 화풍은 대체로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을 따랐으며, 정선(鄭敾)의 초기 작품과도 상통한 데가 있다. 그는 또 화평(畵評)에도 일가견이 있어 그의 문집 중에 보이는 윤두서(尹斗緖)의 《자화상》과 《공재화첩》에 대한 화평, 정선의 그림에 대한 화평 및 중국 화가들에 대한 화평 등은 당대의 회화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1722년 장인이 전남 강진으로 귀양 가자 찾아가는 길에 호남지역을 유람하고 남유록(南游綠)이라는 기행문집을 남겼다. 남유록(南游綠) 가운데서 모정리 쌍취정에 대해서 묘사한 부분만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 쌍취정이 있었던 모정마을 호수 - 연못과 버드나무숲이 무성하다
“송림(松林)이 9리 숲을 이루고 있다. 들으니 쌍취정(雙翠亭) 아래 큰 연못이 있어 여름철에는 연꽃이 무성하게 피고 위로 큰 둑을 쌓아 수양버들 만(萬) 주가 있으며 아래에는 갑문이 설치되어 있어 남쪽 호수로 통하여 자연히 또 하나의 호심정(湖心亭)이 된다고 하는데 그 승경이 어찌 무림(절강성 항주시 서쪽- 항주 이북의 별칭)에서 나왔겠는가? 그러나 우리 동국인들은 일을 좋아하지 않으며, 또 추위에 굶주리는 가난한 거지와 같은 생활을 면치 못해, 비록 아름다운 산과 물이 있어도 가꾸고 다듬어 꾸미는데 있어서 중국인에게 크게 미치지 못한다. 또 이런 말을 들어도 문득 지목하기를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여기니 탄식을 이길 수 있겠는가? ... 조윤신 집에서 식사를 하고 해가 높이 돋아서야 비로소 출행하여 쌍취정에 이르렀다. 연못의 물이 모두 얼어붙었으며, 들 경치 또한 지극히 을씨년스러웠다. 다만 창문을 열면 바로 월출산의 푸르름을 대할 수 있으니, 이것이 최고의 승경이다. 벽에 문곡(文谷)이 추서한 석천(石川)의 시가 걸려있는데, 시격과 필의(筆意)가 두루 다 볼만했다. 조군 형제들이 이곳에 와서 서로 전별했다. 연못을 따라 위쪽으로 몇 리 가다가 돌아보니 모든 사람들이 오히려 돌아가지 않고 서성거리고 있는데, 자못 헤어지기 섭섭해서 그러는 것을 알 수 있겠다. 길을 돌아 녹동서원에 들렸는데, 연촌 최덕지 선생에게 제향하는 것이다.

남유록(南游綠)에 나오는 쌍취정과 모정마을 풍경
▲ 비죽에서 바라본 모정마을 호수와 십리평야.
남유록에 따르면 1722년 11월 29일에 구림마을에 들러 조윤신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다음 날 쌍취정을 향해서 출발한다. 그 이전 일정에는 월출산 상견성암과 도갑사를 들러 시를 한 수 남긴 것으로 되어있다. 아무튼 기행문에 묘사된 표현을 잘 살펴보면 쌍취정의 주변 풍경을 선명하게 그려볼 수 있다. 조윤신 집이 있던 구림마을 서호정에서 모정마을 쌍취정까지의 거리는 약 십리(9리)이고 오는 길은 소나무 숲이 울창했다. 큰 연못, 만 주의 버드나무, 너른 들녘, 창문을 열면 한 눈에 보이는 월출산 전경, 문곡 김수항과 석천 임억령의 글씨와 시(詩), 둑방길 등이 묘사되어 있다. 바로 당시의 모정마을 호수와 들녘, 그리고 호수가 쌍취정에서 바라본 월출산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다. 현재의 모습도 거의 그대로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일제시대 당시 저수지를 확장하면서 호수가 훨씬 커졌고 여러 차례의 공사 때문에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거의 소실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저수지 둘레에는 크고 작은 버드나무가 여러 그루 남아있다. 그리고 앞에서 이야기 했지만 쌍취정이 서호면에 있는 한 마을로 팔려가서 그 터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모정마을에서는 그 터가 있던 곳을 쌍취정이라고 불러왔다. 지금은 바로 곁에 원풍정이 있어서 그 이름이 많이 희미해지기는 했지만.

“창문을 열면 바로 월출산의 푸르름을 대할 수 있으니, 이것이 최고의 승경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쌍취정은 내부에 조그마한 방을 갖추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것은 담양의 소쇄원이나 식영정을 비롯한 많은 정자들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양식이다. 여름에는 사방의 창문을 활짝 열어 바람을 불러들이고 겨울에는 창문을 닫아 바람을 차단하는 용도로 쓰이던 아주 조그마한 방이다. 특히 엄동설한의 추위를 대비하여 구들장을 깔아 난방을 하기도 했다. 모정마을 주민 김학수씨(92)는 쌍취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쌍취정은 임구령 목사가 진남제를 완성한 후에 중형인 석천 임억령과 함께 지은 정자였다. 정자 규모가 꽤 컸었다. 땅바닥에서 마루까지의 높이가 높아서 꼬마들이 그 사이로 뛰어다닐 수 있었다.” 주춧돌에서 마루판까지의 높이를 미루어 짐작해보면 쌍취정은 누정 양식에 가까운 정자였던 것 같다.

담양의 고서의 식영정과 영암 모정리의 쌍취정
당시 석천 임억령은 담양의 식영정에서 여러 학자들과 더불어 시를 짓고 당시 시국에 대한 담론을 나누던 유림의 명사였다. 담양 고서의 식영정과 영암 모정마을의 쌍취정을 오가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진다.<계속>   글 / 사진 김창오 편집위원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