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국사 전설 탐방로’ 개설을 꿈꾸며


     상전벽해의 현장으로
▲ 모정리 비죽에서 바라본 월출산과 여름 들녘.

월출산 전체를 한 눈에 조망해 볼 수 있는 구릉에 자리한 모정마을의 역사는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의 지형은 현재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조선시대 초까지만 해도 구림마을과 양장마을로 이어지는 언덕길을 제외하고는 동쪽과 서쪽으로 바닷물이 출입했다. 즉, 서쪽으로는 서호강과 접하고 동북쪽으로는 덕진강과 만나서 너른 갯벌이 형성되어 있는 반도(半島) 모양의 지형이었다. 도포와 덕진포로 연결되는 이 덕진강에서 모정마을 알춤사장까지 배가 들어왔다. 그런데 약 450년 전 동호마을과 언머리를 잇는 진남제가 축조되어 십리평야가 생겼고, 뒤이어 일제시대 말에 서호면 성재리에서 군서면 양장마을 구성(九成)을 잇는 언둑이 축조되어 ‘학파농장’이라고 하는 너른 간척지가 생겨나게 되었다. 바다로 둘러싸인 어촌 마을이었던 이곳은 덕분에 영암에서 가장 너른 들녘을 간직한 농촌 마을로 바뀌게 되었다. 벽해(碧海)가 상전(桑田)이라는 말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비죽(飛竹) - 도선국사의 전설이 시작되는 곳
현재 모정(茅亭)마을이란 이름을 갖기 전의 지명은 비죽(飛竹)이었다. 모정(茅亭)이라는 이름은 모정사(茅亭祠)의 유래와 그 궤를 같이하는데 이것은 나중에 다시 자세히 다룰 참이다. 이 비죽(飛竹)이라는 지명은 도선국사의 탄생설화와 관련이 있다. 도선국사실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어머니 최씨가 어느 겨울 날, 영암 성기동에 있는 구시바위 아래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푸른 참외 한 덩이가 물에 떠내려 왔으므로 그것을 건져 먹게 되었다. 그 뒤 임신을 하여 달이 차도록 맵고 비린, 냄새나는 채소와 고기를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경전을 읽고 염불 외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해산때가 되어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가 신라 경덕왕 말년 무렵이었다. 한데 사람의 도리가 없이 아이를 낳았으므로 아버지께 큰 꾸지람을 듣고 숲 속 반석 위에다 내다버렸다. 최씨 부인은 여러 날이 지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다시 그곳에 가보았더니 비둘기 떼들이 모여들어 날개로 아이를 덮어 보호하고 있었다. 부인은 그 신기한 광경이 예사롭지 않은 일이라고 여기고 아이를 다시 집으로 안고 가 키우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마을 이름이 지금도 구림(鳩林)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아이를 버린 반석 이름을 국사암(國師岩)이라 일컫게 되었다.” 

▲ 비죽에서 내려다본 백암동과 백의암. 마을 앞 들녘 가운데 조그맣게 보이는 바위가 백의암이다.
비죽(飛竹)은 도선국사를 덮어 보호한 비둘기 떼가 날아간 지역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비죽은 도선국사의 전설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되는 셈이다. 비죽은 모정마을의 여러 소지명(小地名) 중 하나로 방축리와 초장골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다. 모정마을 남쪽 언덕에 자리하고 있어서 내려다보는 주변 풍광이 빼어나게 아름답다. 십리평야가 생기기 전에는 이 비죽리가 작은 마을이었다. 지금은 완전히 밭으로 변했지만, 과거에 쟁기질하던 중 흙 속에서 기와나 도자기 파편이 자주 출토되기도 했다. 이런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당시 도기를 생산하던 가마터가 있던 지역일 것이라고 추증해본다.


      백의암(白衣岩) 전설
▲ 백의암 - 멀리 매향비가 숨어있는 엄길리 철암바위가 보인다.
비죽에서 서쪽으로 내려다보면 언덕 아래에 작은 마을이 하나 보인다. 바로 백암(白巖) 마을이다. 이 마을 앞 들 가운데 제법 큰 흰 바위가 하나 있다. 이 바위는 도선국사의 죽음을 상징하는 ‘도선이 바위’로 전해져온다. 원래 이 바위는 간척지가 조성되기 전까지 바다 속에 있던 작은 바위섬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도선국사가 배를 타고 떠날 때 물 위로 솟아있는 바위 위에 입고 있던 웃옷을 벗어 걸쳐 논 다음, “이 바위가 검은 색을 띄면 내가 죽은 것이고, 흰색을 띄고 있으면 살아있는 것으로 알라”고 말했다는데 지금도 바위가 흰 색깔을 띄고 있다. 이 백의암은 비죽에서 국사암으로 가는 중간지점 정도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비죽이나 백의암을 나타내는 이정표가 없어서 찾아가기가 힘들다. 신흥교차로 삼거리에 비죽과 백의암 표지판을 세워두면 답사객들에게 유용할 것 같다.


     이제 도선국사를 전면에 내세워야
이제까지 구림마을을 중심으로 많은 문화관광 사업을 해왔지만 실상 구림마을의 지명유래를 가져온 도선국사의 전설을 활용한 아이템 개발은 아주 빈약했다. 한옥마을 조성, 왕인공원 조성, 기존의 도기문화센터를 도기박물관으로 격상, 한지공예전시관 개관, 마을길 돌담 쌓기, 각종 가로수 식재하기 등 영암군에서는 구림마을에 많은 투자를 해왔고 문화관광 보존과 개발적인 측면에서 괄목한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한적한 시골마을에 전시관과 공원이 생기고 푸른 숲이 조성되어 주민들의 생활환경이 쾌적해지고 구림마을을 찾는 관광객들 또한 점점 많아지고 있다. 지금까지 군에서 해온 일들은 참으로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우리 군에서도 이제 외연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구림권 문화역사 보존과 개발영역을 인근 마을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특히 도선국사의 전설을 담고 있는 백암동과 모정마을을 문화관광 개발권으로 확대시킨다면 뜻밖의 성과를 거둘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왕인박사 위주로 진행된 여러 가지 문화관광 사업을 도선국사를 구림마을과 연계시킨 사업으로 확대하는 일이 영암 관광산업을 발전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지명도 측면에서도 타당한 일이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 중 도선국사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왕인박사는 적어도 지명도 면에서는 도선국사에 비할 바가 아니다. 역사적 사료나 기록 면에서도 도선국사가 단연 앞선다. 영암의 풍수와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을 이렇게 묵혀두고 있는 것은 너무나 아깝고 안타까운 일이다.


     도선국사 전설 탐방로 개설을
모정마을 비죽-백암동 백의암-서호정 국사암-성기동 구시바위와 최씨원까지 이어지는 ‘도선국사 전설 탐방로’를 영암군에서 개설한다면 훌륭한 스토리텔링 도로가 될 것이라 믿는다. 이 탐방로에는 너른 들녘과 1000년 역사가 살아 숨쉬는 전설의 바위들과 아름다운 문화마을 등이 모두 포함된다. 비죽에 비둘기 공원을 조성하여 도선국사 탄생설화의 출발지로 삼아 1000년 전의 역사와 전설을 체험하게 하면 어떨까? 비죽은 더군다나 동쪽으로는 병풍처럼 펼쳐진 월출산과 십리평야를, 서쪽으로는 영암아리랑에 나오는 몽해들을 동시에 조망해볼 수 있는 천혜의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모정마을에 숨어있는 여러 가지 문화유산들을 발굴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면 도선국사 탐방로와 더불어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2010년 말이면 현재 공사중인 두 개의 다리(주룡대교와 신금대교)가 개통될 예정이다. 주룡대교는 영산로를 따라 무안 신도시로 연결되며, 신금대교는 영산로를 따라 시종 마한문화공원으로 연결된다. 구림마을에서 신금대교를 건너 시종 마한으로 통하는 길목이 바로 이 모정리 비죽이다. 또한 무안 남악 신도시에서 주룡대교를 건너 영산로를 따라 구림마을로 통하는 길목 또한 이곳 비죽이다. 이 길은 그 지리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미래 영암 관광도로의 한축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그 때를 대비해서라도 비죽에서 최씨원 구시바위까지 이어지는 ‘도선국사 전설 탐방로’를 개설해 두는 것이 앞날을 내다보는 관광행정이 될 것이라 믿는다. /글·사진=김창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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