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천면장 할래? 모정이장 할래"


▲ 모정마을 표지석
동호마을에서 들녘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배롱나무 길을 따라 1km정도 걷다보면 제법 큰 마을이 마중 나온다. 동호리, 양장리와 더불어 십리평야를 감싸고 있는 삼리 마을 중 규모가 가장 큰 마을이다. 새마을운동 전에는 약 200호에 이를 정도로 번창한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그 절반인 100호로 줄었다. 전성기 때는 “옴천면장 할래? 모정이장 할래?”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여느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주민들이 노령화되었지만, 그래도 다른 마을에 비해서 젊은 층이 많은 편이다.


     평야 위에 떠 있는 섬
▲ 모정마을 초입의 초여름 풍경
모정 마을은 월출산 천황봉에서 굽어보면 넓은 평야 한 가운데 떠있는 섬처럼 보인다. 바다가 아닌 평야 위에 떠있는 섬인 셈이다. 동쪽으로는 남성적인 월출산이, 서쪽으로는 여성적인 은적산이 자리하여 음양의 이치를 절묘하게 조화시키고 있다. 월출산과 은적산의 중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아침 월출산 일출과 저녁 은적산 노을을 모두 볼 수 있다. 물론 달 뜨는 모습과 지는 모습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다.

남쪽으로는 흑석산이, 북으로는 시종 태산과 신북의 호산이 멀리 바라보인다. 동호리쪽에서 보면 잘 안보이지만 마을 동편에 제법 큰 저수지가 하나 있다. 다른 저수지와는 달리 마을과 바로 접해 있어서 농업용수를 제공하는 역할 뿐만 아니라 마을의 풍광에 운치를 더해주고 또한 동네 사람들에게 수변공원 역할까지 제공한다.

북쪽과 동쪽으로 진남제와 관련한 너른 들녘을 접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도 옛날 ‘학파농장’으로 알려진 너른 평야가 인접해 있다. 나지막한 구릉지대에 자리잡은 모정마을은 남쪽으로는 신흥동, 서호정 마을과 통하고 북쪽으로는 양장, 성재리 마을로 통한다. 이 구릉지대에서 바라보는 주변 풍광이 가히 일품이다.


     누운 소(와우) 형국
모정마을은 풍수적으로 와우형국(臥牛形局)이다. 누운 소 형국의 마을들은 주로 완경사 평야지대에, 큰 하천 줄기가 아닌 작은 물줄기 곁에, 논농사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다. 모정마을의 입지 조건이 바로 이와 같다.

와우형국이란 마을의 모양이 소가 누워있는 모습을 닮은 것을 말한다. 소는 두말할 필요 없이 농사를 최고의 생업으로 여겨 온 우리 민족에게 가족처럼 소중한 존재였으며, 농사일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생산 활동의 원동력이었다. 쟁기질, 써래질 뿐만 아니라 무거운 것을 나를 때 수레를 끄는 일을 도맡아서 했다.

우경법의 발견으로 해서 농업생산력이 향상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농경문화가 발달했다. 소는 덩치가 크고 힘이 센 반면 성격이 온순하고 강직하다. 음식을 먹을 때 서서 먹기도 하지만 누워서 먹기도 한다. 소가 한가롭게 누워서 되새김질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평화와 태평, 그리고 풍요를 상징한다. 예부터 이런 와우형국에서는 자손 대대로 큰 인물이 출생하고 자손이 누워서 먹을 수 있는 복을 누린다고 알려져 있다.


      소와 관련된 소지명(小地名)
▲ 월출산과 모정마을
모정마을이 누운 소 형국임을 나타내주는 소지명(小地名)이 몇 개 있다. 소 외양간을 뜻하는 ‘외양골’, 풀을 저장해놓는 장소를 뜻하는 ‘초장골’, 소를 방목하여 기른다는 뜻의 ‘방축리’, 멍에 아래 소 등을 보호하기 위해 덮는 천을 뜻하는 ‘두데미’ 등이 소와 관련된 소지명이다. 외양골은 마을 서쪽 언덕 끝자락에 있다. 어렸을 때 동네 꼬마들과 더불어 저 외양골에서 모여 대나무 막대기 칼싸움을 하던 기억이 난다. 초장골은 마을 남서쪽 소나무 동산 아래 위치해 있다. 방축리는 마을에서 구림마을로 넘어가는 구릉지대에 자리하고 있는데 주변에 울창한 소나무 숲이 많아서 등하교길에 참새가 방앗간 찾듯이 들러서 쉬었다 가는 쉼터였다. 두데미는 마을 안쪽의 남서쪽 언덕을 일컫는 지명이다. 연날리기 놀이가 한창이던 시절, 추운 겨울날 따뜻한 햇볕이 많이 드는 이곳에서 동네 꼬마들이 하루 종일 연날리기를 했던 곳이다.

한편, 소는 힘이 세고 온순하지만 한편으로는 고집도 세다. 그래서 모정마을은 기운이 센 터를 누르기 위해 대보름에 줄다리기를 했다. 동네 아낙네들은 줄다리기가 끝난 후에 강강술래를 했다. 모정마을 대보름 줄다리기는 워낙 씩씩하고 흥겹게 행해져서 인근 마을 주민들까지 구경 올 정도였다. 모정 줄다리기는 2008년 10월 순천에서 열린 ‘남도 문화제’에 영암군 민속놀이 대표로 출전하여 ‘얼’상을 받기도 했다.


     유무형 문화재들이 즐비한 마을
▲ 월인당에서 바라본 월출산 일출
모정마을에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전설과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다. 도선국사의 전설이 깃든 비죽(飛竹), 광산 김씨 가문에 3대에 걸친 효자들의 덕행을 기려 임금이 직접 교지를 내려 하사한 삼효자문(세현문), 석천 임억령 선생과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풍류가 스며있는 쌍취정, 진남제를 완성한 임구령 목사의 후손들과 모정마을 주민들 간에 소송이 생겨 그 결과물로 세워진 영암 유일의 철비(鐵碑)인 관찰사 김병교 영세불망비, 영암이 낳은 가야금 산조 창시자인 김창조 선생의 수제자인 한성기 가야금 명인 생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5칸 한옥의 서당건물인 선명제, 동네 사람들의 3년간에 걸친 울력으로 건축된 광산김씨 문각인 사권당, 평산 신씨 문각인 돈의재, 호수 가 절벽 위에 세워진 원풍정과 원풍정 12경, 정월 대보름날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전래 민요가락에 맞추어 놀던 모정 줄다리기, 보름달이 뜰 때마다 동네 사람들이 달을 바라보면서 안녕을 빌던 정자 망월정, 추석 때마다 콩쿨대회가 열리던 팽나무와 소나무숲이 어우러진 울춤사장,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예술인촌을 형성했던 달터 등 차근차근 살펴볼 가치가 있는 자료들이 많다.

모정마을 여기저기를 걸어 다니면서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것들을 심도 있게 살펴볼 예정이다. 호수가 원풍정과 둑방길, 도선국사의 전설이 시작되는 비죽, 나그네가 쉬어가던 솔짓개 등 마을 전체를 구석구석 걸을 것이다. 고향 이야기는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발로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사진=김창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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