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의 청죽예술「영암참빗」전국 명성
인근 송평리까지 한때 200~300호 참여


     농한기에 참빗 만들어
▲ 30여년전, 망호리의 한 농가에서 부부가 손자의 도움을 받아가며 참빗을 만드는데 여념이 없다(1978년 4월29일자 전남일보 자료사진). 오른쪽 윗사진은 완성된 참빗.
우리 선조들이「머리털 하나라도 부모가 물려준 것」을 배우며 살았을 때부터 긴머리 아녀자의 낭자를 틀게 해주고 처녀, 총각의 댕기머리를 곱게 드려준「靑竹의 예술」 영암읍 망호리는「영암 참빗」의 본고장이었다.

망호리에 정착한 경주이씨(慶州李氏)의 10대조 이정팔은 효성이 지극하여 출천지효자로 경주이씨 가문의 문헌으로 전해오는데 그분께서 경주·대구를 내왕하면서 부모님의 머리에 있는 이(蝨)를 제거하기 위해 요즘 말로, 「벤치마킹」해왔다고 한다. 나중에는 나라의 임금님께서도 진상품으로 올라온 참빗을 빗어 보시고 그 효를 치하하고 칭송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참빗을 만드는 가구가 망호리에는 약 80~100호 정도였으며 인근마을에서도 그 기술이 파급되어 송평리 등에 약 200~300호가 참빗을 만들었다. 예전에는 참빗 하나에 약 서푼 정도 값이었으며 농한기에는 약 5일 동안에 200~1000개 정도가 생산되었다.「어리빗 참빗만 품고 가도, 너 복이 있으면 잘산다」고 시집간 딸을 달래며 살아온 촌부의 아픔도 함께 지켜봐온「영암 참빗」이 이젠 현대문명에 밀려 명맥이 끊겨버렸다.

이 마을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조 중엽부터 가업으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참빗을 빚어내며 살아왔다. 그래서 얼핏 보면 울창한 대나무밭에 둘러싸였을 것으로 생각되나 오히려 다른 농촌마을 보다 대나무가 적은게 이상하다. 참빗을 만들기에 적당한 대나무는 1~2월과 7~9월 성장기에서 물이 빠지는 시기 것이라야 한다. 인근에서는 장암·영보·금정·신북에서, 멀리는 강진·담양·나주지역에서 사다가 생나무로 쓰거나 말렸다가 쓰기도 했고, 대개 농번기철을 제외한 11월에서 다음해 4월까지 집중적으로 참빗을 만들었다. 대나무에 상처가 없는 부분을 한매듭씩 대톱으로 자르고 대통의 매듭이 없는 부분을 돌려가며 큰칼로 쪼갠다. 속껍질은 버리고 겉껍질만 분리한 뒤「조름」이라는 기구를 이용해 더욱 정교하게 다듬는다.

그 다음 사람 소변이나 물감에 넣어 끓여서 염색을 한다. 향토색으로 염색한 살대를 일정한 간격으로 자르고 빗 한개당 100개부터 120개의 빗살을 흩어지지 않게 맞추어서 단단히 실로 얽는 작업을 할 때에는 3~5가구 정도 돌아가면서 여자들끼리 품앗이를 하였다.

빗의 위·아래에는 소다리뼈나 대나무로 만든 받침(이를 매기라고 한다)을 대고 다시 참빗의 양쪽 등에 납작한 등대를 아교로 붙인 다음 양쪽에 고정시킨 대와 실을 뽑는다. 큰칼로 빗볼을 다듬어 윤을 내는 등 세공을 한다.

빗살 고르기가 끝나면 염산을 인두에 묻혀서「靈岩特産」또는 달이 뜬 월출산이나 다른 무늬를 새겼다. 마지막으로 동백기름 등으로 기름칠을 한다. 한개의 참빗을 만드는 데는 위와 같이 청죽매듭을 자르는 것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기름칠까지 무려 200번의 손질이 필요하다.


     일본·만주까지 수출
망호리 참빗이 전국에서 으뜸이었던 것은 손질을 많이 하여 빗살이 가늘고 매끄러워 머리털을 파고들 때 스스로도 모를 정도로 섬세하고 정교한데 있었다. 이를 흔히 비법이라지만 오랜 세월을 두고 익혀온 손재주의 경험적 산물일 뿐이다. 이들이 좌선을 하듯 조용히 앉아 빗살을 다듬는 진지한 모습은 차라리 진지한 기도처럼 고요해지고 대살을 다듬는 가느다란 소리만 온 마을에 여울질 뿐이다.

1987년 4월 29일자 특집「토속기행」에 실린 망호리 이정덕(86)씨의 술회를 더듬어 보면 당시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이웃 도포면 성산리 안풍마을에서 시집와 시할아버지와 시부모로부터 배운 이 전승의 유산을 안고 16년 전 바깥양반이 돌아가실 때까지 살아왔어. 한창 새댁시절에는 초롱불을 켜놓고 밤을 세워가며 참빗을 만들 때는 허리 아픈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손바닥이 얼얼하여 아침 밥 짓고 수저잡기가 불편할 만큼 고된 일이었제. 그렇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대나무 값이 거의 무(無) 값이어서 10배의 이윤이 있는데다 일본·만주까지 수출이 잘되어 그 재미로 날새는 줄 몰랐고 온 가족이 참빗과 함께 살았어.”

수년전까지 이 마을 이식우(전라남도 참빗 기능보유자·인간문화재)씨가 명맥을 이어왔으나 그가 고인이 되면서 맥이 끊겼다. 지금도 가끔 여러 경로를 통해 참빗 구입문의가 들어오고 있다. 그래서 다시 복원하자는 논의도 있다. 300년의 청죽예술「영암참빗」이 재현되어 영암을 소개하는 문화재나 특산품으로 거듭나게 하자는 것이지만, 아직도 논의 수준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계속> /명예기자단 자문위원=서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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