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의 유산‘세시풍속’면면히 이어져
동짓날 팥죽으로 이듬해 일년사 점치기도


한겨울 김장 담그기
본격적인 겨울이 되었다. 찬바람과 매서운 눈이 오기 전에 서둘러 김장을 한다는 김제댁의 손길이 분주하다. 이른 아침식사를 마친 안동댁이 먼저 오더니 이웃 아주머니들도 앞치마에 손을 묻고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서둘러 강경에서 사돈께서 보내온 액젓에 마늘, 청강, 갓, 고춧가루, 석화, 돼지의 살코기를 넣어 배추속을 만든다. 어제부터 건져내어 물기를 빼놓은 배추 사이사이에 속을 넣고 비닐에 담는다. 예전 같으면 단지며 김칫독에 넣었을텐데 그게 아니었다.

대문밖에는 택배차가 와서 서울 등 친척들에게 보낼 김치상자를 꾸리고 있다. 그리고 겨울동안에 먹을 김장김치에는 소금을 좀더 뿌려서 통에 넣어 김치냉장고 속에 묻어둔다. 그사이 마당 가운데에 있는 평상 주위에는 마을이장 등 여러분이 갓 삶은 돼지고기에 새 배추김치를 말아들고 복분자술에 권하고 있다. 취기가 돌 무렵 안주인은 이장 오토바이 짐칸에 회관용으로 배추김치 2통을 실어 놓는다. 후한 인심에 잔치 분위기다. 처마 끝에는 금방 매단 듯 메주가 대롱대롱 매달려 숙성이 될 채비를 하고 있다.


동짓날의 세시풍속
▲ 팥죽과 가야금우리의 조상들은 역신을 쫓기 위해 동짓날 팥죽을 쑤어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었다.

이튿날, 아침이 아직 이른데도 일권이 이모님께서는 팥죽을 쑤어 가지고 오셨다. 마을회관 앞에서는 대통령 선거홍보 차량에서 확성기 소리가 숨 가쁘게 들린다. 아직 동짓날은 며칠 남았는데도 동명댁집에서는 동지팥죽 잔치를 하자고 부른다.

동지는 24절기 중 22번째 절기다. 음력으로는 11월 중기(中氣)이며, 양력으로는 태양이 적도이남 23.5도의 동지선(冬至線;南回歸線)과 황경(黃經) 270도에 도달하는 12월 22일 또는 23일을 가르킨다. 또한 대설의 다음이며 소한의 앞으로 24절기 중 가장 큰 명절이었다.

일 년 중에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 동지. “동지를 지나야 한살 더 먹는다”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먹는 것이다”는 말이 마을에 전해오는 것은 동짓날에 동지팥죽을 먹는 전통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동지를 애기동지, 큰동지, 노인동지로 나누었는데 동지가 음력으로 10일안에 들어 있으면 애기동지, 보름께에 있으면 큰동지 또는 어른동지, 그리고 말께에 있으면 노인동지가 된다고 했다. 애기동지에는 동지가 에리다(어리다)고 하여 팥죽을 쑤어먹지 않고 떡을 대신해서 먹었다. 올해는 큰동지이니 팥죽을 쑤어 먹자고 했다.

붉은 햅 팥을 삶아 체에 걸러서 찹쌀가루를 솥에 넣고 물을 부어가면서 계속 끓인다. 끓일 때 앙금과 찹쌀가루로 빚은 새알심을 넣고 소금간하여 한 번 더 끓이니 팥죽이다. 영암읍노인회 김영도 회장께서 팥죽을 드시면서 “동지팥죽의 유래는 중국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공공씨(共工氏)의 망나니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서 역신(疫)이 되었거든, 그 아들이 평상시에 팥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역신을 쫓기 위해 동짓날 팥죽을 쑤어 먹었다”는 말씀을 들려주신다.

이러한 유래로 해마다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쑤어 맨 먼저 잡귀신이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바가지에 팥죽을 퍼서 솔잎으로 담벽과 집 둘레, 그리고 텃밭에 뿌리고 곳간, 마루, 부엌, 뒤주 등 집안 곳곳에 한 그릇씩 떠 놓았다. 팥죽을 쑤면 집집마다 나누어 먹고 젊은 아이들은 밤늦게까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얻어먹었다.


동지팥죽 점치기도
또한 중국의 고의서인 ‘본초강목’에는 “팥에 부종을 없애는 힘이 있다”고 기술돼 있다. 이밖에도 한국인의 주식인 쌀에는 비타민 B1이 거의 들어 있지 않아 영양학자들은 팥밥, 팥죽이 쌀밥보다 영양적으로 더 우수하다고 한다.

그리고 팥에는 콩과 더불어 해독 효과가 있어 주독이 있거나 황달 등 간에 좋다는 연구결과들이 많다. 팥죽을 끓일 때는 철제 냄비를 사용하지 않도록 권하기도 한다. 이는 팥에 든 안토시아닌이 철과 결합해 검게 변할 수 있어서다.

또한 팥죽을 쑤면 이것으로 다음해의 일년사를 점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을 동지팥죽 점이라고 하고, 동짓날 저녁에 들에 가서 보리를 뽑아보고 일년사를 점쳤다. 뿌리가 세 개면 시절이 좋고, 둘이면 중실(中實)하며, 하나거나 없으면 일년사가 흉할 것으로 점쳤다. 그 외 동지의 세시풍속으로 논 밭둑 태우기, 날짐승보기, 첫눈(雪)먹기, 나이 먹기, 달력 보내기 등을 하였는데 음력으로 동짓날은 마치 양력으로 연말인 12월에 해당되어 이 일은 동짓달에 많이 행해지고 있다.

우리 마을의 풍속, 특히 세시풍속은 선조들의 지혜의 산물이랄 수 있는 유산이다. 세시풍속을 소중히 살려가면 그 절기의 풍류를 누릴 수 있어 정신건강에도 유익하기 때문이다. 비록 김치, 팥죽을 예로 들었지만 우리가 즐기는 세시풍속에 깃든 음식문화가 지닌 건강기능적인 지혜의 우수성은 많은 연구를 통해서 과학적으로 영양성분과 건강기능성 성분이 조화를 이루어 그 우수성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 늘 전통의 지혜와 현대적인 삶의 조화가 어우러져 나아가야 할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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