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준 풍요의 땅


뻐꾸기 울음소리 길어지고, 꿩 울음소리 깊어 가면 5월은 다시 깊은 한숨을 토하며 몸을 뒤척인다. 봄이 가고 마침내 여름이 오는 신호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때마침 절기가 소만(小滿)이라, 가뭄에 애타는 농부들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하늘이 제법 굵은 빗줄기를 내려 농사일을 돕는다. 이때다 싶게 농부들은 텅 빈 논에 찰찰 넘치도록 물을 채운다. 가득 찬 논물에 5월의 석양이 얼굴을 담그면 온 들녘은 빠알간 하늘을 품은 바다가 된다. 서해바다 너머로 지는 저녁노을이 장엄하다면 논물에 비친 노을은 소박하고 친근하다. 이제 농부들은 비슷하지만 결국 다른 여명의 붉은 하늘빛을 맨발로 일그러뜨리며 한 포기 한 포기 정성껏 모를 심을 것이다. 어린 벼 포기가 물속에서 뿌리를 내리며 커가는 동안 대지는 어느덧 연초록으로 자신의 색깔을 바꾼다.

수패 - 온 마을 사람들의 쉼터

▲ "수패" 팽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십리평야
마을마다 동네 사람들의 쉼터 역할을 하는 특별한 장소가 있다. 그곳에는 보통 커다란 당산나무와 정자가 있기 마련이다. 동호리 또한 예외가 아니다. 동호마을에는 “수패”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언둑이 시작되는 바닷가에 위치한 마을 공터로서 둘레에 오래된 팽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수 백 년 된 아름드리 고목들이 즐비했었는데 수명이 다한 관계로 지금은 몇 그루 밖에 남지 않았다. 이 팽나무 숲은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추석 명절 때 온 동네 사람들이 걸판지게 한판 놀던 콩쿨대회 장소였다. 동호마을 출신인 최천옥(64) 시인의 표현대로 “수패에는 몇 백 년도 넘는 아름드리 팽나무가 있었고, 어느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고운 모래가 깔린 씨름판이 있었다. 그곳은 정월 대보름 밤이면 당산제 모시느라 꽹과리 북 장구 소리로 진동하였고, 추석 명절 보름밤이면 노래자랑 콩쿨대회가 열리고 청소년들의 어설픈 연극무대도 열렸었지. 그곳은 연극무대가 열리는 날 밤이면 온 동네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노래자랑 콩쿨대회가 열리는 날 밤이면 옆마을 뒷마을 앞마을에서 노래깨나 부른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마을 공동체가 온전한 모습으로 작동되던 시절의 정겨운 풍경이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모습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아직 살아남아 수패의 한 모퉁이를 쓸쓸히 지키고 있는 늙은 팽나무만이 그 좋았던 옛날이 다시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왜 그 곳을 “수패”라고 부르는지 궁금해서 마을 주민들에게 물어보았다. 최석연(74)씨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 그곳은 아름드리 팽나무 숲으로 뒤덮여 있었제. 지금이야 관리가 안 되서 대부분 고사되어 죽고 없지만. 동네 아이들이 친구들한테 팽나무 숲으로 놀러가자고 말할 때 ‘숲에’ 가자고 말했었지. 그 ‘숲에’가 발음을 하다보니까 ‘수패’가 된 것이여. 별 뜻이 있는 게 아니고 말 그대로 숲을 의미하는 것이제.” 그런데 아쉽게도 수패에는 무성한 팽나무 숲에 어울리는 그럴싸한 정자가 없다.

커다란 팽나무 그늘 아래에 서서 한참동안 주변을 둘러보았다. 팽나무 가지 사이로 너른 십리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온다. 때마침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이제 막 익기 시작하는 보리 이삭을 뒤흔든다. 일렁거리는 보리논 위로 흰나비 한 쌍이 파닥거리며 오월의 햇볕을 희롱한다. 하지만 이 너른 들에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소 풀 뜯기는 목동도, 보리피리 불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소년, 소녀도 찾아볼 수 없다. 언머리까지 이어지는 언둑길도 한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둑방길은 낮아져 이미 평평한 신작로가 되었고 그 길은 더 이상 젊은 남녀들의 데이트 길이 되지 못한다. 짱뚱어 팔딱팔딱 뛰며 소년들 유혹하던 갯벌도, 조용히 들려오던 밀물 파도소리도 없어진지 오래이다. 45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진남제(언둑)는 자신보다 더 큰 영산강 하구둑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그 자취를 감추었다. 살신성인의 자세로 자신을 희생시켰던 진남사 오중스님의 전설 또한 더 이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못할 것이다. 누구 하나 돌보아 주는 이 없이 비바람에
▲ 동호 전통 메주마을 간판
노출되어 점점 희미해져가는 심군수 선정비 비문처럼 언젠가는 언둑도, 수패도 그 기능을 잃고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온다.

전통 메주마을 명성
수패 팽나무숲 속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언둑을 거닐며 부르는 처녀 총각들의 노래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지만, 제비가 점지해준 풍요의 마을답게 동호마을 주민들은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15년 전인 1994년 중반 무렵에 7명의 마을 주민들이 모여 영농법인을 결성했다. 바로 전통 메주 공장을 설립한 것이었다. 법인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정명진(51)씨는 이렇게 말한다. “농촌에서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농한기에 접어드는데 이 시기를 그냥 화투나 치면서 무의미하게 보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뭔가 할 만한 일을 찾아서 시도해보기로 했다. 당시에 뜻있는 몇 사람이 모여서 전통 식품인 메주를 만드는 사업을 해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처음 소규모로 시작한 메주 사업은 품질을 인정받아 입소문을 타고 점차 번창해갔다. “주로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과 광주에 사는 대도시 시민들이 고객들이다. 이들 중 10년이 넘은 단골손님들도 적지 않다. 요즘은 직거래 뿐만 아니라 인터넷 판매도 활성화되고 있다.”

메주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콩은 모두가 인근 마을에서 생산된 것이다. 정명진씨는 계속해서 말한다. “우리

▲ 당산제 터 - 느릅나무와 당산지신단
가 사용하는 콩은 주로 동호, 오산, 신마산 등 3개 마을 주민들한테 계약 재배한 것과 다름없는 방식으로 조달한다. 메주는 10월부터 만들기 시작하 여 12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만 한정적으로 판매한다. 이것은 된장을 담그는 시기와 맞물려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된장은 연중 판매된다. 메주 생산량은 1년에 2,000개 정도이며 된장을 담는 옹기는 100개 남짓 갖추고 있다.” 콩 가격이 많이 올랐어도 메주 가격은 15년 전에 비해 크게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판매량에 비해 소득은 아주 많은 편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도 요즘처럼 안전한 먹거리를 찾기가 힘든 시기에, 그리고 웰빙 트렌드가 유행인 세상에서, 신뢰할 수 있고 품질 좋은 전통 식품을 도시인들에게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한다.

한 마을 두 개의 당산터
동호마을에는 당산제를 지내는 터가 두 개나 있다. 하나는 바닷가 소나무 아래에 있는 입석이고 또 하나는 탐진최씨 문각인 오돈재
▲ 당산제 터 - 입석과 서호지신상
안에 있는 느릅나무이다. 바닷가 당산터는 위에서 말한 수패 바로 곁에 위치해 있다. 이 입석아래 단상에는 “서호지신상”이라고 씌어져 있다. 400년 된 느릅나무 아래 단상에는 “당산지신단”이라고 씌어져 있다. 한 마을에 두 개의 당산터가 있다는 사실이 몹시 흥미롭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모정마을에서 정월 대보름 때 줄다리기를 크게 했다면, 우리 동호리에서는 당산제를 크게 모셨제.”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계속) 글 / 사진 김창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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