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 스탬프 투어 및 마한 창작 그림 그리기 대회가 영암군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로 나름의 성과를 내며 막을 내렸다. 이태원 참사로 인하여 준비한 여러 기획을 다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신안의 섬 학교 학생 및 시종의 부녀회원도 참여하는 등 예년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참가 단체 및 인원을 통해 행사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행사 성공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 영암군민과 영암군청, 시종면을 비롯한 행정기관, 영암교육지원청과 참여학교 관계자들에게 깊이 감사를 드린다. 필자는 공부할수록 ‘정체성’의 의미가 가슴에 와
월출산 도갑사군서면 도갑사로 306 주소지에는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79호인 도갑사가 자리하고 있다. 일주문 못미처 왼쪽에 도갑사 해설판이 세워져 있다. “도갑사는 통일신라말 도선국사(826~898)가 헌강왕 6년(880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져오고 있으며, 1999년 대웅전 뒤편 건물지 발굴조사에서 백제시대 기와편이 출토되어 통일신라 시대 이전에 이미 사찰이 있었음을 추정하고 있다. 도갑사가 크게 번창한 때는 조선시대 초기이다. 이곳 영암 출신인 수미왕사가 1457년부터 1464년까지(세조3~10년) 대대적으로 중창했는데, 당시
무장읍성 역사와 복원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무장읍성(사적 제346호)’은 지난 1991년 사적 346호로 지정됐다. 길이 1천400m에 13만2천231㎡(4만평)의 면적에 객사, 동헌, 진무루 등이 있다. 무장읍성은 1417년(태종 17)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을 합쳐 그 중간 지점에 무장현을 두고 군사·행정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만 명이 동원돼 4개월간 축조한 곳이다. 남문과 동문 등 2개의 성문 중 남문인 진무루(鎭茂樓)는 복원됐다. 방어시설로서 해자와 성벽의 간격이 옹성부분에
장보고의 출생지라고 알려진 완도에는 출생과 관련된 어떠한 설화도 전하지 않고 있어 의아스럽다. 장보고와 관련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당제(堂祭)가 완도 장좌리 장도에서 오랫동안 행해지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당제를 모시는 당집의 가운데는 주신 격인 송징 장군, 우측은 정년 장군, 좌측은 혜일대사가 배향되어 있다. 장도 지역에서는 송징이라는 인물이 그 지역의 상징 인물이고, 장보고는 그곳에 아예 배향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최근(1982)에 이르러서야 겨우 배향의 대상으로 추가되었던 것이다. 장도 지역에서는 장보고가 아닌
수남사기(水南寺記)월출산은 실로 신라 말에 명승 도선국사가 주석한 곳이다. 도선 공이 처음으로 그 산의 정맥에 대가람을 세워 바로 소위 도갑사라 하였다. 또한 산이 내외로 둘러 있고 절간이 백여 채가 바위 골의 숲 줄기에 이어 속세로부터 은둔하여 살고자 하는 이들이 가히 미혹할 만한 곳으로 끼쳐왔었다. 비록 세월은 오래되어 자취도 없이 황폐하고 무너졌으나 지금 있는 것은 능히 그 십 분의 일도 못 되며 옛터에 유적만 남아 있으니 보고 기록하는 사람들이 가히 또렷이 찾아볼 수 있다.도갑 남쪽 산골의 계곡물을 쫓아가자면 위쪽에 한 구역
역사는 반복한다. 이번 이태원 참사도 2014년 발생한 세월호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탓이다. 필자가 이렇듯 강하게 말한 까닭은 녹취록이나 보고 채널 등에서 어쩌면 2014년과 판막이라고 하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역사가 소중한 까닭이다. 최근 도갑사 산사음악회를 다녀왔다. 도갑사는 도선 스님이 주석하여 유명해졌다. 도선 스님의 얘기는 이미 본란을 통해 상세히 언급한 바 있거니와,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필자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믿는다. 해상왕 장보고얼마 전 모 연구기관이 장보고와 마한이 관계가 있는지
안용당과의 인연필자가 죽정마을 안용당을 처음 보았던 때는 1998년 봄이었다. 아직 벚꽃이 피기 전이었으니 3월 중순으로 기억된다. 그때는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마을로 이사 온 직후였다. 10대 후반에 집을 떠나 서울살이를 하다가 16년 만에 돌아온 고향이었다. 오랜만에 만나게 된 고향인지라 이곳저곳이 몹시 궁금하여 발길 닿는 대로 아무 곳이나 가보고 싶었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어느 날, 무턱대고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광활한 모정마을 들녘을 지나 비구름이 산 중턱까지 내려온 월출산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구림마을 동계
지난 10월 22일 밤 월출산 도갑사에서 산사읍악회가 열렸다.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와 반주에 문자 그대로 '야단법석' 이었다. 야단법석을 설법한 부처님께서 빙긋이 웃고 있을 법하였다. 문득, 필자는 우리나라 종교의 전래과정을 생각해보았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필자가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영산 지중해를 통해서였다. 나주 불회사의 마라난타 초창 전래설화는 이와 관련이 있다 하였다. 그런데 불교는 들어오면서 기존의 전통신앙과 조화를 꾀하였다. 곧 무불융합(巫佛融合)을 꾀하였다. 사상적 마찰이 적은 까닭이다. 고려 후기에 들어
안용당기(安用堂記)옛날 한창여(당송팔대가 중 한 사람)가 이원(당나라 사람)이 반곡(盤谷)으로 돌아가는데 전송을 하면서 이원의 말을 기술하고 세상에서 때를 만난 사람과 만나지 못한 사람의 일을 낱낱이 서술하였다. 비록 한결같이 운명으로 돌리기는 특별히 형세를 따르려는 분주함과 만에 하나라도 하는 요행을 바라는 자를 재기하여 결단하였으니 그 현명하고 현명하지 못한 구분이 어찌 뚜렷하지 않겠는가? 아! 선비가 세상에서 때를 만나거나 때를 만나지 못함은 제각기 운명이 있어 진실을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없이 오랜 세
흥양읍성의 역사고흥은 본래 장흥부 묘부곡(猫部曲)이었다가 고려 충렬왕 11년(1285년)에 고흥현으로 승격했다. 조선 태조 4년(1395년) 왜구가 날뛰면서 이를 피해 보성군 조양현으로 관아를 옮겼다가 이후 세종 23년(1441년) 보성군 관할 남양현과 합쳐 ‘흥양’이란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일제강점기 때인 1914년 다시 고흥군이 된다. 옛 흥양현은 서남해안을 낀 고흥반도 행정치소이자 조선 수군의 중요 방어기지로 선조 때 전라좌수영 산하 10개 군사기지는 5관5포였으며 그중 1관4포가 흥양현과 그 산하 해안 고을에 자리했다. 1
해상강국 마한의 꿈이 담긴 ‘마한! 세계로, 미래를 디자인하다’라는 슬로건을 표방한 전라남도가 주최하는 ‘2022 마한문화 행사’는 오는 11월 3일 시종 마한문화공원에서 열린다. 전남문화재단과 초당대학교 산학협력단이 주관한 ‘마한, 쏙쏙쏙 어디까지 가봤니?’ 행사의 하나인 ‘마한 캐릭터’ 공모전을 시작으로 화려한 막이 올랐다. 필자가 재직한 대학에서 이번 행사를 전남문화재단과 함께 주관하고 있다. 작년에 나주 다음 개최지로 영암을 적극적으로 추천하였던 필자는, 마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행사의 성격을 어떻게 극대화하게 할 것인지 고
어느 마을을 가도 그 마을의 구석구석을 지칭하는 소지명(小地名)이 있다. 원주민들이 생활의 편의를 위해 그 장소의 특징을 고려하여 새로운 지명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고, 역사적인 배경을 품고 있는 유물이나 유적을 기념하여 지명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신화나 전설, 민담이나 설화를 바탕으로 해서 생겨난 지명들도 있다. 이 소지명은 외지 사람들에게는 낯설겠지만, 원주민들에게는 마치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암호와도 같다. 그 마을의 소지명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토박이인지, 이주민인지 금방 파악할 수 있다. 죽정마을은 천하
고창읍성 역사와 복원전북 고창은 풍수지리학상, 오행에 적합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드문 지역으로 동쪽과 남쪽이 높은 반면 서북쪽이 낮게 형성돼 있다. 따라서 통풍과 햇빛이 골고루 퍼져 농작물 재배는 물론 인간의 두뇌 형성에도 아주 좋은 인맥의 고장이자 예향으로 널리 알려진 고을이다.고창에는 고창읍성, 무장읍성, 흥덕읍성 세 개의 읍성이 있으며 이중 고창읍성은 백제시대 ‘모양부리’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모양성’이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졌다. 고창읍성(사적 제145호)은 호남 내륙의 방위를 위한 전초기지로 1453년(단종 원년)에 왜적을
지난 10월 8일 전라남도가 주최하고 전남문화재단과 초당대학교 산학협력단이 주관하는 2022마한 행사의 하나로 수행되고 있는 ‘마한 쏙쏙쏙 어디까지 가봤니’라는 주제의 스탬프 투어가 마한문화공원 일원에서 펼쳐졌다. 모두 6회로 진행된 행사의 첫 회로, 시종 부녀회, 문태고 및 영암중학교 학생 등 40여 명이 참가하였다. 신·구가 조화된 참가자들을 보며 취재차 나온 언론인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특히 이들 언론인은 영암 마한의 고분유적 및 해양유적인 남해신사의 가치에 대해 깊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필자는 이번 전라남도 마한 행사
도갑리 죽정마을은 면적이 굉장히 넓다. 동쪽은 선인봉에서 영암읍 회문리에 이르고, 미왕재(억새밭)에서 강진군 성전면 죽전마을과 접경한다. 동남쪽은 안바탕에서 학산면 묵동마을에 이르고, 남쪽과 서쪽은 동구림과 접한다. 북쪽은 성양리와 경계를 이루고 북동쪽은 월곡리와 접경하고 있다. 죽정마을을 한 눈에 내려다보기 위해서는 음지마을 뒷동산에 있는 월대바위에 올라가야 한다. 마을 주민들은 월대바위를 ‘황(凰)바우’라고 부른다. 월대암 위에 올라서면 서쪽과 북쪽으로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영암평야가 시야에 들어오고 동쪽과 남쪽으로는 월출산의
남원성과 만인의총신라 신문왕(재위 681∼692) 때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원지역에 소경(지방도시)을 설치하고 691년에 쌓은 네모난 형태의 평지 읍성이다.1982년 사적 제298호로 지정되었고 2011년 7월 28일 남원성에서 남원읍성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전북 남원시 동충동 464-1번지 일대에 소재한다.남원읍성은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 당시 왜군에 의해 성을 끝까지 지키던 민·관·군 1만여명이 순절한 곳이기도 하다. 사적 272호인 만인의총은 순절한 1만여명의 합장유적으로 호국의 얼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 때문에 학
오는 11월 3일은 전라남도가 주최학고 전남문화재단이 주관한 ‘2022 마한문화행사’가 시종면 마한역사문화공원에서 열린다. 이 행사는 2019년 역사문화자원 정비와 관련된 특별법에 마한이 포함된 것을 기념하여 2020년 서울, 2021년 나주에 이어 2022년 영암에서 열릴 예정이다. 나주 다음으로 영암에서 마한 문화행사가 열려야 됨을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다. 특히 올해는 국립마한센터 건립 등 마한과 관련된 논의들이 나오고 있는 터에 이러한 행사가 영암에서 열리게 되어 더욱 뜻깊게 생각한다. 특히 전라남도 마한문화행사와 함께 영암군
2017년 당시 죽정마을 노인회장이셨던 최홍 어르신에게 죽정마을의 역사와 풍속에 대해서 청해 들은 적이 있다. 다음은 그때 기록한 내용이다.중국에서 온 보살할미와 문수암 문산재 터“월대암과 문산재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문곡 김수항 전집을 보니까 남암이라고 하는 도갑사 암자가 있었다고 해요. 낭주최씨 제각 안에 있는 남암골이 바로 남암의 터라고 봐요. 나중에 문곡이 남암을 수남사로 이름을 바꾸었고요. 남암골을 안바탕이라고 하는데 그 안바탕 들어가는 곳에 있는데 터만 남아 있다요.그리고 문산재도 원래는 문수암이라는 암자였어요. 문
왜곡된 역사 바로 잡아야마한은 대국(大國)인가, 소국(小國)인가. 어리석은 질문일 줄 모르겠다. 마한은 소국이라고 전문가이든, 일반인이든 모두 그렇게 알고 있다. 특히 마한의 독특한 문화요소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고 하는 전남지역조차 ‘소국’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2012년 나주에서 개최된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되어 2017년 출간된 ‘전남지역 마한 소국과 백제’라는 전문서가 확실한 근거를 제공해주었다. 마한은 소국이라는 인식을 확실히 하기 위해 전라남도나 각 시군에서 무척 노력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6월 해
평리마을을 떠나 죽정마을로 발걸음을 향한다. 동쪽 월출산 방향으로 배롱나무 길을 따라 약 1km를 걷다 보면 벚나무 가로수 길이 나온다. 여기에서 월출산 도갑사 방향으로 한 걸음만 걸으면 도갑리 1구 죽정마을로 접어들게 된다.죽정(竹亭)마을은 도갑리 1구로 동구(洞口), 양지(陽地)마을, 음지(陰地)마을, 선인동(仙人洞)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동구에 백제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찰 도갑사(道岬寺 수남사)를 비롯하여 여러 암자 터가 있으며, 월대바위 아래에는 1832년 대동계에서 성기동에서 이전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한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