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국사’ ‘신집 5권’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다. 독자들이 초중고 시절 귀가 아프게 외웠던 삼국의 역사서이다. 백제, 신라, 고구려 역사서이다. 근초고왕, 진흥왕, 영양왕 때 저술된 책들이다. 이 역사서는 모두 삼국의 국력이 왕성할 때 편찬되었다고 배웠다. 우리가 출세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과거의 나를 그럴듯하게 세탁한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그의 선대 이야기를 신화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대표적 예이다. 일연도 삼국유사 서문에서 한 나라를 건국한 인물은 보통사람과는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출생과 관련된 얘
필자는 요즘 들어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부쩍 강조한다. 정체성은 자존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상대를 존중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기 열등감이 강하여 늘 욕구 불만에 가득하고 남에 대한 배려도 약하다. 논어에서 말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은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말라는 말이다. 곧 주체성을 지니되 상대에 대한 배려를 이야기하고 있다. 글로벌 사회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공자님 말씀을 현재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이다. 동서고금이 상호 유기적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화이부동’의 단어 하나로 확인할 수 있다. 영암
도갑사와 조선 시대 선비들구림마을에 살았던 향촌 선비들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월출산을 유람하러 온 시인 묵객들이 남긴 시문을 읽으면서 새삼 새롭게 느낀 것은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되고 있던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사찰의 스님들과 생각보다 많은 교류와 소통을 했었다는 사실이다. 셀 수없이 많은 시문이 있지만 여기 대표적인 글 몇 편을 소개한다. 구암(龜岩) 임호의 유고(遺稿)구암공 임호는 1540년 진남제를 축조하여 간척지를 조성한 월당 임구령의 장남으로 회사정을 짓고 구림 동계를 중수하여 구림 사회의 기틀을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던 사람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에 의해 정착우리나라의 문수신앙은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에 의해서 정착되었다. 『화엄경』에 의하면 문수보살의 상주처(常住處)가 중국의 청량산이라고 한다. 자장이 청량산의 태화지(太和池)에 있는 문수보살 석상 앞에서 7일 동안 기도하여 보살로부터 범어로 된 사구게(四句偈)를 받았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범어로 된 내용이어서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때 한 노승으로부터 꿈(범어 게송)에 대한 해석을 듣고 부처님의 가사(袈裟)와 발우를 받았다. 노승은 신라의 왕이 여성이라 위엄이 없기 때문에 이웃 나라들이 얕보는 것이
‘혁신으로 도약하는 더 큰 영암’의 군정 목표 아래, 우승희 군수가 10개 분야, 120개 공약을 확정하고,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혁신 시책 발굴과 군민소통 창구를 만드는 의미 있는 한 해를 마무리했다.큰 위기 속에서 변화와 혁신으로 미래성장기반을 구축하며 군민과 함께하는 새로운 혁신 영암군의 2022년 한 해를 결산해 본다.▣ 위기 속에서 속도감 있는 행정올해 영암군은 제3회 정리 추경 기준 7천998억원으로 8천억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대폭적인 재정 확장 속에서도 영암군은 채무 제로를 유지하고 있다. 복지, 문화관광, 스
필자는 1년이면 외부 특강 기회가 수십 차례 있다.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대학교, 성인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집단을 상대로 고대 마한부터 현대에 이르는 전남의 지역성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역사를 알려는 까닭은 자아 형성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한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영암은 한민족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이순신 장군이 ‘약무호남 시무국가’라는 표현을 영암인과의 편지글에서 하였고, 서울 숭실대 박물관에 보관된 독자적인 문화의 특질을 드러낸 거푸집이 영암에서 출토된 사실들은 이 지역의 역사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문수신앙의 발상지, 도갑사도갑사 홈페이지에 따르면, “문수신앙의 발상지, 산문에 문수·보현동자가 모셔져 있는 도갑사 해탈문”이라는 도갑사 소개 글이 나온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화신으로 일컬어지는데, 우리나라에서 문수신앙을 대표하는 사찰은 오대산 상원사와 월출산 도갑사로 알려져 있다. 홈페이지에도 소개되어 있듯이 도갑사에서는 문수신앙과 관련한 특별한 유물과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해탈문에 봉안된 문수동자상이다. 사자를 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기사문수동자상’이라 부른다. 이는 지혜를 상징함과 함께 위엄과 용맹을 표현한
메이지 시대, 토요도미 히데요시필자는 최근 광복회 전남도지부의 ‘국외 항일유적지 탐방단’의 해설 강사로 일본을 다녀왔다. 우리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오사카 지역은 마하 시기에 도래인들이 이주하여 개발한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정치·경제적인 이유로 일본에 건너간 우리 동포들이 가장 많이 집단촌을 형성하며 지낸 곳이 오사카 지역이다. 오사카, 나라에는 고대 마한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번 답사에서 필자가 새롭게 확인한 역사적 사실이 있어 잠깐 소개한다. 오사카성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
도갑사에는 도갑사의 역사와 흥망성쇠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비가 두 개 있다. 도선국사비와 수미왕사비가 그것이다. 도선국사는 신라 말에 도갑사를 창건한 승려이고, 수미왕사는 조선 초에 도갑사를 중창한 승려다. 도갑사 경내를 둘러보다 보면 먼저 수미왕사비를 만나게 된다. 대웅보전 뒤 국사전 곁에 자리하고 있다. 우선 수미왕사비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도갑사 수미왕사비는 영암 출신 수미왕사의 활동과 자취를 기록한 비이다. 경내 국사전 곁 다소 외진 곳에 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이 비는 돌거북인 귀부와 비의 몸체, 그리고 용을 아
사찰 내 불전(佛殿)과 전각의 의미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도입된 때는 삼국시대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는 372년 소수림왕 때 전진의 '순도'가 불경과 불상을 가져왔다고 알려져 있고, 신라는 눌지왕 때 고구려 승려 '아도'가 전래했는데 이른바 '이차돈의 순교'로 527년 법흥왕 때 공인되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인도 간다라국에서 온 마라난타라고 하는 고승이 384년 침류왕 원년에 중국 동진을 거쳐 백제에 불교를 전했다고 한다. 이 연대로 추정해본다면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가 1600년이 넘었다. 이 기간 동안 불교가
지난 12월 1일 기찬랜드 내 트로트가요센터에서 (사)마한역사문화연구회가 영암군의 지원을 받아 ‘해양제사 유적과 월출산’이라는 주제로 마한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이번 세미나는 월출산과 남해만을 중심으로 형성된 해양제사의 특징을 찾아보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를 통해 해상강국 마한의 중심지로서 영암의 역사적 위치를 밝혀 세계유산 등재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세미나 주제를 정하였다. 국립마한센터 유치 논의가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마한의 심장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 영암에서 열린 이번 세미나가 영암의 역사문화자원을 새롭
사찰의 삼문사찰의 문은 부처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절은 불전(佛殿) 앞에 세 개의 문을 세워놓고 있다. 일주문, 사천왕문, 불이문(해탈문) - 이 세 개의 문을 일컬어 삼문(三門)이라고 한다. 사찰에 세 개의 문을 두어 부처를 모신 불전에 들어서는 길을 길게 유도하는 방식은 고려 말부터 유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갑사에는 사천왕문은 없고 일주문과 해탈문, 두 개의 문만 있다. 일주문(一柱門)은 사찰 삼문 중에서 가장 앞에 있는 문이다. 일주문은 기둥이 일렬로 서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기둥을 일직선으로 세운
12월 1일(목) 영암군의 지원으로 (사)마한역사문화연구회가 주관한 ‘2022 마한 학술세미나’가 월출산 기찬랜드 내 한국트로트가요센터에서 열린다. 이번 세미나는 ‘해양제사 유적과 월출산’이라는 주제로, 월출산과 남해만을 중심으로 형성된 고대 마한 시대부터 형성되어 있는 제사유적을 살핀다. 이를 통해 이 지역 제사유적의 특징이 해양문화와 관련이 있음이 드러나리라 기대하고 있다. 아울러 고대 해상왕국 마한의 정체성을 이 지역이 대변하고 있음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격려를 기대한다. 이번 세미나와 관련하
상견성암도갑사는 신라 헌강왕 8년(880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본래 12암자를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상견성암과 동암 두 곳만 남아 있다. 이번에 답사할 곳은 바로 이 도갑사 상견성암이다. 사실, 구정봉 아래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용암사지에서 노적봉 밑에 위치한 상견성암까지 통하는 좁은 샛길이 있다. 하지만, 용암사가 폐사된 후로 발길이 뜸해져서 여름에는 온갖 잡목과 풀이 우거져서 접근하기가 힘들다. 현재 상견성암으로 향하는 가장 일반적인 길은 도갑사 대웅전을 지나 홍계골을 오른편에 끼고 억새밭 방향으로 잠
마한 스탬프 투어 및 마한 창작 그림 그리기 대회가 영암군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로 나름의 성과를 내며 막을 내렸다. 이태원 참사로 인하여 준비한 여러 기획을 다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신안의 섬 학교 학생 및 시종의 부녀회원도 참여하는 등 예년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참가 단체 및 인원을 통해 행사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행사 성공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 영암군민과 영암군청, 시종면을 비롯한 행정기관, 영암교육지원청과 참여학교 관계자들에게 깊이 감사를 드린다. 필자는 공부할수록 ‘정체성’의 의미가 가슴에 와
월출산 도갑사군서면 도갑사로 306 주소지에는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79호인 도갑사가 자리하고 있다. 일주문 못미처 왼쪽에 도갑사 해설판이 세워져 있다. “도갑사는 통일신라말 도선국사(826~898)가 헌강왕 6년(880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져오고 있으며, 1999년 대웅전 뒤편 건물지 발굴조사에서 백제시대 기와편이 출토되어 통일신라 시대 이전에 이미 사찰이 있었음을 추정하고 있다. 도갑사가 크게 번창한 때는 조선시대 초기이다. 이곳 영암 출신인 수미왕사가 1457년부터 1464년까지(세조3~10년) 대대적으로 중창했는데, 당시
무장읍성 역사와 복원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무장읍성(사적 제346호)’은 지난 1991년 사적 346호로 지정됐다. 길이 1천400m에 13만2천231㎡(4만평)의 면적에 객사, 동헌, 진무루 등이 있다. 무장읍성은 1417년(태종 17)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을 합쳐 그 중간 지점에 무장현을 두고 군사·행정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만 명이 동원돼 4개월간 축조한 곳이다. 남문과 동문 등 2개의 성문 중 남문인 진무루(鎭茂樓)는 복원됐다. 방어시설로서 해자와 성벽의 간격이 옹성부분에
장보고의 출생지라고 알려진 완도에는 출생과 관련된 어떠한 설화도 전하지 않고 있어 의아스럽다. 장보고와 관련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당제(堂祭)가 완도 장좌리 장도에서 오랫동안 행해지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당제를 모시는 당집의 가운데는 주신 격인 송징 장군, 우측은 정년 장군, 좌측은 혜일대사가 배향되어 있다. 장도 지역에서는 송징이라는 인물이 그 지역의 상징 인물이고, 장보고는 그곳에 아예 배향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최근(1982)에 이르러서야 겨우 배향의 대상으로 추가되었던 것이다. 장도 지역에서는 장보고가 아닌
수남사기(水南寺記)월출산은 실로 신라 말에 명승 도선국사가 주석한 곳이다. 도선 공이 처음으로 그 산의 정맥에 대가람을 세워 바로 소위 도갑사라 하였다. 또한 산이 내외로 둘러 있고 절간이 백여 채가 바위 골의 숲 줄기에 이어 속세로부터 은둔하여 살고자 하는 이들이 가히 미혹할 만한 곳으로 끼쳐왔었다. 비록 세월은 오래되어 자취도 없이 황폐하고 무너졌으나 지금 있는 것은 능히 그 십 분의 일도 못 되며 옛터에 유적만 남아 있으니 보고 기록하는 사람들이 가히 또렷이 찾아볼 수 있다.도갑 남쪽 산골의 계곡물을 쫓아가자면 위쪽에 한 구역
역사는 반복한다. 이번 이태원 참사도 2014년 발생한 세월호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탓이다. 필자가 이렇듯 강하게 말한 까닭은 녹취록이나 보고 채널 등에서 어쩌면 2014년과 판막이라고 하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역사가 소중한 까닭이다. 최근 도갑사 산사음악회를 다녀왔다. 도갑사는 도선 스님이 주석하여 유명해졌다. 도선 스님의 얘기는 이미 본란을 통해 상세히 언급한 바 있거니와,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필자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믿는다. 해상왕 장보고얼마 전 모 연구기관이 장보고와 마한이 관계가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