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정마을 여기저기를 답사하던 중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가 영암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월출산 생태탐방원’ 유치에 이은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와 함께 걱정도 들었다. 최근 경남 김해의 ‘가야사 복원’ 사업 과정에서 일어난 역사 왜곡 사건과 현재 전라남북도와 광주시가 공동으로 주관하여 출간하기로 한 ‘전라도 천년사’가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심각하게 마한과 백제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실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마한(馬韓)을 강조하기 시작한 우리 영암은 이러한 식민사관의 역사,
마한 정체성은 백제 멸망 후, 통일신라기까지도 이어졌다고 필자는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다. 그것은 800년 넘게 고유한 문명을 이룩한 그 정체성의 뿌리가 강고하였기 때문이다. 견훤이 나라를 세울 때 마한의 정체성을 계승하겠다고 한 것은 전라도 지역에 광범위하게 인식된 마한의 힘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5월 12일 견훤 대왕이 세운 후백제의 역사를 찾고자 전북일보 취재팀이 광주, 나주, 영암 지역을 찾았다. 이들 일행을 필자는 견훤과 왕건이 대회전을 한 영암 덕진강 전투 현장, 견훤의 전방 지휘본부 구실을 한 자미산성, 후백제와
문산재 안내판 내용문산재 왕인박사 수학지(修學池)인 유교적 칭호로서 주지봉(문필봉)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경내는 약 200여평 되는데 석축대가 있고 앞에는 석탑대 주축돌이 발굴된 백제때의 와당, 신단대 등이 있으며 조선기 도기 파편도 있고 아래에는 성천(聖泉)이라고 불리는 조그마한 우물이 남아 있으며 문산재에서 유생들이 수학하여 인재가 많이 속출된다는 소문이 전차되자 문인재사와 수학자들이 각처에서 운집하여 군자 석학을 수없이 배출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양사재가 있는데 이른바 유생들이 수학하는 서원식재당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이
죽음의 공포, KBS 광주방송총국 청사공포에 떨며 죽음을 기다렸던 KBS 직원 10여 명은 모두 빠져 나와 목숨을 건졌다. 5월 20일, 이날 밤 10시쯤 MBC가 불에 타 전소되었고 다음날 5월 21일 새벽 5시 15분쯤 KBS 광주방송국도 결국 불에 타버렸다.그 후 KBS 광주의 모든 보도 기능이 마비되었다. 이때부터 서울 본사에서 긴급 취재반이 내려와 서울뉴스에 참여했다. 보도에 참여하지 못한 KBS 광주 기자들은 자신의 취재 수첩에 당시 각종 민주화운동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또 기록을 남기기 위해 정부에서 뿌린 각종 인쇄물을
온전하게 남아 있는 옛 유적영암군과 (재)대한문화재연구원에서 발행한 ‘영암 월출산 월산사지 3차 발굴조사 보고서’에는 어떤 이유에서 발굴을 시작했는지에 대한 발굴 동기와 3차에 걸쳐 진행된 발굴 과정이 다양한 도면과 사진이 함께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월산사지 발굴조사는 세 단지로 구분하여 진행되었는데 1단지는 2004년과 2009년에, 2단지는 2013년에 이루어졌다.1단지에 대한 1, 2차 조사결과 조선시대 건물지 4동과 고려시대 건물지 5동이 조사범위에서 확인되었다. 특히 조선시대 건물지는 기단과 초석, 계단, 배
죽정마을 30회를 끝으로 도갑리 연재를 마치고 구림마을로 발길을 돌리려고 하던 차에 한 독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월산마을에 거주하는 박창진(96세) 씨라는 분으로 월산사와 관련해서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약속된 시간에 월산사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월산사를 지키고 있는 혜심 스님이 자리를 함께 했다.‘도선국사 입문지’ 입석이 있던 곳혜심 스님이 향기가 은은하고 그윽한 목련꽃차를 내주며 월산사 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30여 년 전에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도선국사입문지’라고 음각된 오래된 입석이 있었습니다. 그
계엄군의 KBS 편파 보도 조작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올해로 43주년이 되었다. 1979년 10월 당시 KBS 본사 사회부에서 지방근무 1년 의무근무로 KBS 광주방송총국으로 발령을 받았다. 광주에 내려가 1년 동안 전남도경찰청과 광주경찰서 출입 기자로 근무했다. 광주에 내려간 지 6개월 만에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취재했다.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벌써 40여 년의 수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그런데 5.18 광주민주화운동 상처에 대한 치유가 아직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광주 민주화운동 희생자, 부상자, 실종자와 관련한 현안들이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이하 센터) 후보지가 영암으로 결정되자 필자에게 축하 전화가 많이 왔다. ‘영암’ ‘나주’ ‘해남’ 등의 특정 지역을 넘어 영산강 유역 마한이 한국 고대사의 원류임을 밝히려 노력한 필자는 영산 지중해의 중심에 있는 나주·영암 어느 곳에 센터가 들어서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여러 차례 얘기한 바 있다. 그런데도 이번 센터 후보지 선정은 영암이 되어야 한다는 소신이었다.오롯이 간직한 마한의 정체성나주는 국립나주박물관과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등 국립 연구기관이나 관람시설이 2개소나 있지만, 나주에 버금가는 영암은 우리나
선인동 삼효문월산마을에서 벚꽃 가로수길을 따라 죽정마을로 가다보면 월악동 못미처 오른편 길가에 작은 정려문과 비각이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김해김씨 삼효문이다. 정려문 우측에는 김씨 문중에서 세운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에 설명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효행삼효정려문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395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삼효문은 김해김씨 사군파 양무공 김완 장군의 십세손이신 성린공의 영모각, 정묵공의 실적비각, 사윤공의 삼효각으로 효행 삼효 정려문이다. 고종 24년(1887년)에 성린에게는 증(贈)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명하고
제18회 시종면민의 날이 지난 4월 21일 있었다. 마한 시대의 복장을 하고 깃발을 들고 시종면 소재지를 돌아 행사장인 시종초등학교로 들어가는 행렬이 장관이었다. 재경향우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찾은 출향인과 지역 주민들이 4년 만에 열린 행사에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하루 전, 국립 마한역사문화센터 영암 유치가 발표되어 행사를 더욱 뜻깊게 하였다. 필자도 행사에 참여하여 옥야리 주민들이 정성껏 마련한 ‘마한 밥상’을 대접받았다. 시종은 대한민국 마한 유산의 최대 보고(寶庫)이다. 이곳에는 50기가 넘는 대형고분이 밀집된 고분군과 전국
국장생이란, 말 그대로 나라의 명으로 건립된 장생이란 뜻이다. 사찰의 경계 표시뿐만 아니라 비보(裨補)의 역할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중기 이후로는 장승이라고 불리었다. 죽정마을 국장생은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거친 표면에 국장생(國長生) 세 글자의 한자를 크게 새겨 넣었다. 안내판 내용은 다음과 같다.“영암 죽정리 국장생은 돌로 만든 장승으로 ‘영암 죽정리 국장승’으로도 불린다. ‘장생(長生)’이란 표기는 주로 신라와 고려 전기에 많이 사용되었으며 고려 말과 조선 전기 이후로는 ‘장승(長丞)’이라는 표기가 많이 보인다.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 영암유치 쾌거4월 20일 역사적인 날이다.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가 영암으로 결정되었다. 뜬 눈으로 날을 새며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마한의 심장, 영암’. ‘해상강국, 마한’,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허브, 마한’ 이러한 슬로건이 바로 ‘영산 내해’에 위치한 ‘영암 마한’에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를 지역 균형과 역사 균형을 꾀하고자 한 전라남도의 꿈이 한 걸음 실현된 듯하여 기쁘다. 아울러 영암을 비롯하여 나주·해남 등 센터 유치를 추진한 다른 지역의 노력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비록, 영
문수신앙의 발원지, 월출산「동국여지승람」에는 월출산을 일러 ‘본국 밖(국외)에서는 화개산(華蓋山)이라 칭한다’는 문장이 있다. 여기에서 말한 ‘국외(國外)’는 중국을 뜻한다. 화개산과 월출산 명칭에 대해서는 1663년에 간행된 「영암지도갑사사적」에 언급되어 있다. ‘옛날 문수대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구름이 항상 산의 제일 높은 곳에 떠 있으므로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서 화개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또, 「월출산」은 달이 떠올라서가 아니라 ‘옛날에 지혜와 용맹을 주관하면서 석가모니불을 왼쪽에서 모시는 문수대사가 월지국에서 나와 이
필자가 본란을 통해 ‘마한역사’를 연재한 지 만 6년, 250회에 이르렀다. 본란을 통해 대한민국 정체성의 상징인 마한의 중심지이자 마한 문명의 발상지가 ‘영산 지중해’라고 주장하였다. ‘마한의 심장, 영암’의 실체가 새롭게 부각이 되었고, ‘해상강국 마한’이라는 전라남도의 지향성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2017년 시작되었던 필자의 연재 글은 2017년 5월 임기를 시작한 문재인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프로젝트와 맞물려 마한사에 관심을 증폭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본보에 계속 연재되는 글을 통해 독자들은 마한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
앞에서도 밝혔듯이 현재의 문산재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여러 차례의 변천 과정을 겪었다. 문산재의 모태는 1657년(효종 8년) 창녕인 태호공 조행립(1580~1663)이 성기동에 설립했던 성기서숙(聖起書塾)으로부터 출발한다. 태호공 셋째 아들인 안용당 조경찬(1610~1678) 부친의 뜻을 받들어 성기서재를 지극정성으로 관리하고 운영했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정황상 강당을 이건할 필요가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죽정마을 20호에 소개했던 최필흥이 쓴 강당 상량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연주인 죽림공 현징을 중심으로 동리 사람들이 모두 힘
지난 3월 31일 왕인문화축제가 열렸던 행사장을 찾았다. 4년 만에 열린 행사인 데다 벚꽃이 만개하여 행사장을 찾는 영암주민 및 외부 관광객이 줄을 이었다. 행사를 준비하는 전 군민들의 역동적인 모습에 동아시아 문명의 허브 역할을 한 고대 마한인의 모습을 본 듯하였다. 행사장에서 많은 군민을 만났다. 한결같이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이하 센터)를 꼭 영암에 유치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 축제 개막행사도 센터 유치기원 행사였을 정도로 영암군·의회가 혼연일체가 되어 발 벗고 나섰다. 본란을 통해 이미 밝혔지만, 마한 전문가의 관점에
삼월 단상 - 꽃이 피어야 비로소 봄이 온다삼월은 봄의 문턱이다. 마당 주변에 심어놓은 봄꽃나무마다 꽃망울이 맺히더니 마침내 순서대로 꽃이 피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매화꽃이 피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매화 봉오리를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이것들이 필 듯 필 듯하면서 그저 머뭇거리기만 할 뿐 선뜻 꽃봉오리를 펼치지 않더니 경칩이 지나자 기어코 청아한 속살을 내보였다. 대숲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매화 향기가 실려 와 코끝이 향기롭다.매화는 추운 겨울을 지내야만 향기가 맑고 속되지 않은 법이다. 매섭고
최근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를 유치하려고 광역자치단체와 기초자치단체의 경쟁이 일어나고 있다. 대한민국 국호인 ‘한(韓)’의 기원이 되는 마한을 연구하는 총본산을 서로 자기 지역에 두고자 하는 것이니 이러한 움직임을 마한 연구자로서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 다만 이러한 관심이 평소에 진정성 있게 있었다면, 마한사가 교과서에서 거의 사라지는 운명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사실 전남도와 영암군이 이른바 ‘마한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그것을 입법화하려 노력할 때, 다른 광역자치단체에서는 ‘OO가야사’를
문수재 중수 상량문(文殊齋重修上梁文) 하은주 삼대로부터 함께 이를 배워 오래도록 현사를 우러름이 연관되는 바요. 시, 서, 예, 악과 학문을 숭상함에 우리 유림이 보고 배워야 할 곳이로다. 봄에는 현악기를 타고 여름에는 시를 읊으며 날로 나아가고 달로 자라네. 벗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고 때로 익히고 배우니 기쁘지 아니하며, 선비들은 밝은 스승을 따라 물어 유익한 점 더욱 점점 이루었네. 공유 우리 고을은 인재의 고을이요. 문헌이 있는 바로 성기동으로부터 서당을 이곳으로 옮겨 세웠으니 흥했다 폐했다 무상하고 문사에 올라와 강론하니
영암군이 2023년을 혁신 원년으로 선포하고 군정 전반의 체질 개선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농식품 산업과 농산물 유통 분야에서도 이러한 의지를 담은 구체적인 실행과제를 발표하고 본격적인 추진에 들어갔다. 지난해 민선 8기 조직개편을 통해 신설된 농식품유통과는 영암군 농산물의 시장경쟁력 강화와 농가소득 증대를 목표로 농정 혁신의 중심에서 활동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 “모든 것을 가공하여 최고의 가치를 키우자!”라는 혁신 비전 아래 소비자 맞춤형 농식품 가공산업 육성, 농산물 유통구조 혁신, 지역자원 중심의 생산-유통체계 확립, 지역 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