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 마을회관 관해재(觀海齋) 광신정 바로 앞에는 기묘한 모습을 한 소나무 한 그루가 나그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두 개의 큰 가지가 몸통을 형성하고 있는데, 한 가지는 위로 솟구쳤고 다른 한 가지는 ㄱ자 모양으로 서쪽을 향해 힘차게 뻗어있다. 집과 너무 가까워 소나무 가지가 지붕에 닿을 듯 아슬아슬 위태로워 보인다. 손금처럼 이리저리 뻗어있는 골목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한 가운데에 이르니 광산마을회관이 보인다. 다른 마을과는 달리 회관 형태가 한옥이다. 6칸 목조 골격으로 기와 팔작지붕이다. 6칸 중 2칸은 누마루이고 나머지 4칸은 벽체가 없는 개방형 방이다. 2칸 누마루도 특색이 있다. 1칸은 툇마루와 같은 높이이고, 맨 왼쪽 1칸은 한 자 정도 높여서 조망권을 확보했다. 누마루에
별을 등진 거리를 떠나면서 불꽃처럼 피어오르던 저녁노을이 긴 산 그림자만 남기고 사그라지면 하늘은 다시 무수한 등불을 밝힌다. 밤이 되어 새로이 나타난 것은 아니리라. 저 등불 들은 낮에도 켜져 있었다. 다만 현란한 태양 빛에 눈이 가려 원래 별들의 모습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고 겉으로 보이는 것에 목을 맨다. 드러난 무성한 곁가지만 껴안고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간다. 오랜만에 도시로 들어와 밤거리를 걸어본다. 태양보다 밝게 빛나는 가로등 불빛, 태양보다 더 이글거리며 작렬하는 탐욕의 네온사인 불빛. 은하수 따라 흐르던 별들은 모두 불나방이 되어 저 도시의 불빛 속으로 떨어져 내린다. 도시의 밤거리에는 떨어진 별들이 타는 소리가 들린다. 무수한 파편이
#초겨울 단상 마침내 영산로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헐벗은 배롱나무 가지에 몇 차례 된서리가 내리더니 오늘 아침에는 첫눈이 내렸다. 영하의 날씨에 산도, 강도, 들도 얼어붙었다. 이와 더불어 사람들의 마음도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무능한 정치가들이 만들어놓은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공포 분위기와 성룡의 액션 영화를 뺨치는 국회의사당 날치기 폭력 장면들이 서민들의 마음을 더욱 얼어붙게 만든다. 이제는 첫눈의 낭만 같은 것도 찾아보기 힘들다. 인심이 살아 있던 시절에는 눈이 내리면 오히려 마음이 훈훈해지고 눈 덮인 마을 풍경도 따사롭고 정겹게 느껴졌다. 그러나 최첨단 과학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대도시 현대인들에게 눈은 성가시고 골치 아픈 존재에 불과하다. 몇 cm만 내려도 교통이 마비되고 골목길이 빙
#태풍에 대한 단상 오후부터 먹구름이 밀려오기 시작하더니 바람이 심상치 않다. 예고한 대로 태풍이 오는 모양이다. 석양 무렵이 되자 태풍은 온 세상을 삼켜버릴 것 같은 기세로 거칠게 내달렸다. 고샅의 고목나무가 곧 뿌리가 뽑힐 것처럼 심하게 흔들거린다. 이팝나무 가지가 찢겨지고 이파리들이 갈기갈기 찢긴 채 허공으로 날아간다. 창고 지붕의 슬레이트가 순간 뽑히더니 우당탕 소리를 내며 뒷마당 장독대 옆으로 떨어진다. 물받이 차양이 위아래로 춤추듯 흔들거리더니 힘없이 휘어져 내린다. 마당의 감나무는 풍성하게 매달려 있던 열매들을 발아래 떨구기 시작한다. 하늘에 가득한 먹구름들은 서로 뒤엉켜 더 높이 솟구치며 어디론가 흘러간다. 이웃집 창고 지붕이 바람에 찢겨 파편처럼 공중으로 튀어 오른다. 그리고 멀리 날
#찬바람이 전해주는 늦가을 통신어느덧 늦가을이다. 아침 저녁의 찬 공기로 보자면 벌써 초겨울로 접어드는 양상이다. 아궁이에 장작을 충분히 넣어야 구들장이 뜨뜻하게 달궈진다. 신덕마을로 통하는 영산로의 배롱나무 가로수들도 벌써 이파리를 모두 떨어뜨려 놓았다. 마치 이동전화 기지국 철탑처럼 앙상하게 뼈만 남은 나뭇가지들이 영산강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매개로 마을과 소통하고 있다. “오늘 새벽에 된서리가 내렸으니, 이제 곧 한파가 몰아닥칠 예정이다. 강물이 흐르지 못하고 도시 빈민들의 마음이 싸늘하게 얼어붙었으니 올 겨울은 유난히 추울 것 같다. 그러니 서둘러 농사일 마무리를 하고 월동 준비를 철저히 해라.” 나뭇가지들이 전해주는 북쪽 소식을 전해들은 산골마을 주민들은 남은 추수를 위해 부지런히 손을
#가을단상 이제 완연한 가을이다. 하늘빛도 산빛도 들빛도 모두 가을색이다. 영산로 배롱나무 꽃길에도 가을이 왔다. 백일 동안 수줍은 듯 피고 지던 배롱나무 붉은 꽃이 지나가는 소슬바람에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배롱나무꽃이 떨어지면 나락이 익는다고 했다. 과연 온 들녘이 탈곡하는 소리로 가득하다. 계절의 순환은 이렇듯 한 치도 어긋나는 법이 없다. 이제 저 노랗게 물든 배롱나무 잎들이 지면 나무들은 긴 겨울 휴식에 들어갈 것이다. 죽은 듯 잠들어 있다가 매화꽃 살구꽃 향기가 봄을 부르는 시기가 오면 나무들은 다시 새움을 틔우고 한여름의 영화를 꽃피울 준비를 할 것이다. 하지만 지난 늦여름 폭풍우에 뿌리를 뽑혀 생기를 잃은 몇몇 나무들은 영영 겨울을 이겨낼 것 같지 않다. 이들은 결국 비바람에 썩어 흙으
니구산마을의 구불구불한 신작로를 나와서 다시 배롱나무꽃이 한창인 영산로에 들어선다. 남쪽 방향으로 곧게 뻗은 길을 따라 가면 은적산 품에 포근하게 안긴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은곡마을이다. 이름 그대로 은적산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인데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시내를 중심으로 양지마을과 음지마을로 나뉜다. 은곡마을은 필자의 고모가 사셨던 마을이고, 지금도 고종사촌 형님이 살고 계시는 마을이다. 어렸을 때는 고모가 사는 마을 이름을 ‘가마굴’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어른이 되어 알아보니 은곡리이다. 마을주민 오상덕(65)씨는 가마굴의 유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옛날에 한 선비가 말을 타고 마을을 지나가다가 말이 목말라 해서 물을 먹이려했다. 그런데 말에게 먹일 물이 없어서 이곳을 갈마곡(渴馬谷)이라고 했
지루하게 계속되던 늦더위와 가을장마가 끝나고 마침내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가을이 오긴 오나보다. 올 여름이 따분하고 길다고 느꼈던 분들께, 그리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분들께, 창문에 부딪치는 밤비 때문에 쓸쓸해하던 모든 분들께 이 편지를 띄운다. ************************* 가을에 쓰는 짧은 편지 ************************* 초가을 아침 불어오는 바람은 어느 한군데 빈틈을 남기지 않습니다. 수확을 약탈당한 청포도 나무 덩굴 사이로도, 똑똑 여물어 가는 뒤뜰 감나무 이파리 사이로도, 보이지 않는 서늘함을 남기고 지나갑니다. 하지만 가을바람은 사람의 마음까지 통과하지는 못합니다. 왜냐면 그것은 바람도, 빗물도 스며들 수 없을 만큼
처서가 지났건만 무더위가 수그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더니, 늦더위 끝에 늦장마가 찾아온 듯싶다. 요 며칠 새에 시도 때도 없이 먹구름이 몰려다니며 장대비를 흩뿌려댄다. 미교마을에서 매월리로 이어지는 배롱나무꽃 만개한 영산로에도 무시로 소낙비가 내린다. 마을을 품고 있는 은적산은 무거운 비구름을 머리에 이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색시마냥 다소곳이 앉아 무심한 눈초리로 영산강에 내리는 소낙비를 내려다보고 있다. 소낙비 여름에 내리는 빗소리는 언제나 청아하지요 곤두박질치는 빗줄기 따라 나는 아득한 추억의 길로 산책을 나갑니다 기억의 빗장을 풀고 사랑채 방문을 열면 그리운 옛 벗들 미소 띤 얼굴로 찻잔 하나씩 들고 단정히 앉아있네요. 창문 밖 여름 들녘은 소낙비 맞아 더욱 푸르고 비구름은 자유로이 구정봉을 넘나드는데
미교마을을 가기 위해서는 다소 인내심이 필요하다. 아침부터 서두를 일이 아니다. 해가 서산마루에 걸리기 직전에 출발하는 것이 좋다. 미교리는 서쪽으로 영산강을 끼고 있으므로 강에 비치는 석양이 아름답다. 백운동을 지나 산허리를 굽이돌면 순간 눈이 부신다. 빠알간 10촉짜리 백열등이 무인도인 가래섬 정상 위에서 강물에 얼굴을 담그고 있다. 주룡나루터도 강 건너 청호리의 상사바위도 늦가을 홍시처럼 얼굴을 붉힌다. 이 시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배롱나무꽃이 만개한 영산로는 산과 강과 하늘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어 저절로 흥겹다. 하루 중 가장 유쾌한 시간대는 이렇게 만물이 서로 화해하면서 긴 그늘을 드리우는 황혼 무렵이 아닐까? 사람의 생애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상사바위의 전설 - 죽음을 넘어선
영산로 배롱나무길 중심에 위치한 유서 깊은 마을인 군서면 모정리가 최근 영암군에서 4번째로 전라남도 “행복마을”로 선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모정마을을 다시한번 들여다고 앞으로 전개될 사업계획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와우형국의 유서깊은 마을 모정마을은 풍수 지리적으로 지형이 소가 누워있는 모습을 한 와우형국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외양골, 초장골, 방축리, 두데미 등 소와 관련된 소지명이 많다. 모정이라는 이름을 갖기 전에는 자연마을로 비죽마을과 중리마을 등이 있었다. 비죽마을은 비취, 비축이라고도 하였으며 모정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비죽은 도선국사의 전설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신라 때 도선국사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 서구림리의 국사암에 내버려진 것을 비둘기, 소리개떼들이 날아와 보호했다는데
영산강 김 창 오 미교리 굽이돌아 한 줄기 강이 흐른다 혼자서만 흐른다면 어찌 강이랄 수 있으랴 강은 언제나 산을 품고 흐른다 산은 강을 따라 흐르지만 탁류(濁流)에 휩쓸리진 않는다 은적산은 수 만년 영산강을 따라 흘렀지만 항상 그 자리에 서있다 산이 푸르러야 강물이 푸른 것이 아니다 강물이 맑아야 산도 푸르다 강물이 맑아야 산 빛도 맑다 언제였던가, 맑고 푸른 은적산이 영산강에 자맥질하던 때는 군서면 월산 삼거리에서 출발하여 동호 모정의 너른 들녘을 관통하다가 서호면 황촌 고갯마루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금강 태백을 거침없이 내달려온 영산로는 마침내 그 이름대로 영산강을 만나 회포를 푼다. 담양군 용면 용추봉에서 발원하여 담양, 광주, 나주를 거쳐 이곳 영암까
서호면 백운동을 끝으로 영산로는 영산강을 만나면서 학산면 관할구역으로 접어든다. 여기에서부터 미교리, 매월리, 석포리까지 이어지는 길이 영산로 배롱나무길의 백미이다. 너른 강폭과 갈대, 무인도, 협곡과 기암절벽 등이 굽이쳐 흐르는 영산강을 따라 펼쳐진다. 특히 미교(美橋)리 앞에 이름 그대로 영암과 무안을 연결하는 ‘아름다운 다리’가 건설되고 있어서 마을을 지나는 사람들이 지명이 갖는 상징성과 예언성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미교리는 은적산 아래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다. 서씨, 엄씨, 김씨, 신씨 등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다. 마을 주민 마행룡(80)씨에 따르면“ 한 때는 70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는데 모두 도시로 떠나고 지금은 30호 정도만 남았제. 다른 마을처럼 젊은이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
청포도가 익어가는 칠월로 접어들면서 연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태양이 뜨겁게 타오를수록 노을빛이 붉은 법이다. 영산로를 품고 있는 은적산 저녁노을이 여름을 만나 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모정마을 솔짓개 동산에 잠시 머물러 서녘하늘에 번지는 노을을 지켜본다. 은적산 저녁노을 이른 새벽 월출산 가파른 절벽을 힘겹게 기어오르던 여름 태양, 막막한 하늘 길을 언제나 혼자서 가는구나. 때로 뭉게구름이 벗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산들바람에도 쉬 흔들리는 모습이 미덥지 못하다. 외로운 길을 혼자서 걷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진리이긴 하다.하지만 외로움은 슬픔이 되고 분노가 되고 결국 붉은 노을로 타오르는 법이지. 여름 태양이 서쪽으로 서쪽으로 항해하다 마침내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것은
뻐꾸기 울음소리가 멀어지는 것과 동시에 영산로에도 마침내 여름이 찾아왔다. 영산로 길섶의 배롱나무 가로수들이 초여름의 탱탱한 햇볕을 받아서인지 기세가 한껏 올랐다. 가지들도 기세등등하게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이파리들도 진초록으로 색깔을 바꾸었다. 농부들이 이미 모내기를 끝낸 들녘 또한 이에 질세라 찰랑찰랑 담겨있는 논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면서 여린 모포기를 쑥쑥 길러내고 있다. 농로와 들판을 무법자처럼 가로지르던 농기계들이 모처럼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양이다. 산도 들도 길도 모두 한가롭다. 길을 걷는 나그네 역시 한가롭다. 유월 하순의 농촌풍경은 목침을 베고 낮잠에 든 농부처럼 이렇게 잠시 휴식을 취한다. 영산로가 금강리를 거쳐 태백리 이르면 은적산 한 복판에 서 있는 느낌이 든다. 은적산은 외부에서 보는
훈요10조의 왜곡과 정치적 악용 왕건이 지목한‘背逆의 땅’은 호남이 결코 아니었다. 고려의 창업주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 중 제8조는 지금까지 호남차별 논리로 이용돼왔다. 그러나 왕건은 호남이 아닌 다른 지역을「배역의 땅」으로 꼽았고, 후세 사람들이 이를 조작한 것이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버젓이 수록되어 있는 왕건의 훈요십조 중 제 8조는 호남차별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로 지역차별주의자들에 의해서 악용되어 왔다. "차현이남(車峴以南)과 공주강외(公州江外)는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배역하였으니 인심도 역시 그러하다. (중략) 비록 선량한 백성일지라도 마땅히 벼슬자리에 두어 권력의 길에 들지 말게 하라." 이것은 조선시대 일부 학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을 쓴 성호 이익과
은적산 기슭으로 굽이굽이 이어진 신작로를 한참 동안 가다가 야트막한 고갯길을 넘어서면 제법 규모가 있는 마을이 나타난다. 고갯마루에는 ‘太平亭 마을’이라고 쓰인 바위 하나가 우뚝 서있다. 태백리의 으뜸마을이다. 남쪽으로는 은적산이, 서북쪽으로는 영산강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마을이 북풍을 막아주는 동산 아래 자리하고 있어서 아늑한 느낌을 준다. 언뜻 봐도 마을이 평안해 보인다. 마을주민 이기봉(83)씨는 이렇게 말한다. “예로부터 어른들이 우리 태백마을을 ‘천하백운 무사태평’이라고 칭했다. 이름 그대로 궂은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태평스런 마을도 일제의 학정(虐政)과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의 격랑을 비껴가진 못했다고 한다. 하긴 어느 마을인들 온전한 마을이 있었을까. ‘태평목’이 마을 유래
# 금파 최순동 공적비 금강마을회관(장부질소리 전수관) 바로 곁에 제법 큰 비가 하나 서 있다. 앞면에는 金波全州崔公順同功績碑(금파전주최공순동공적비)라 씌어있고, 양 옆과 뒷면에는 그가 행했던 행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마을 주민 최길천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우리 마을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일제시대 때 공출미를 저장해 놓은 창고문을 열어 주민들을 구휼한 후 몸을 숨겼다. 1961년에는 마을 개발위원장을 맡아 마을 주민들을 독려하여 무송동에서 금강마을에 이르는 신작로를 만들었다. 온 마을 주민들이 참여한 이 울력은 100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또한 목포에서 마을 앞을 지나가는 여객선이 정박할 수 있도록 닭머리 부근에 선착장을 건설하였다.” 그 살벌하던 일제치하에서 곳간에 보관하고 있던 공출
금강리 당산제 마을 주민 최길천씨는 대보름 당산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60년대 까지만 하여도 그 앞을 지날 수 없을 정도로 숲이 무성했다. 그런데 세월의 흐름을 당하지 못하여 대부분 고사(枯死)하고 지금은 몇 그루만 남았다. 금호정 곁에 위치한 큰 팽나무 아래 상석이 하나 있다. 그곳에서 정월 대보름 때 당산제를 모신다. 정확하게 말하면 정월 14일 밤 11시 넘어서 제를 모신다.” ‘당산할매’에게 제를 거행하며 부락의 평안을 기원한다. 당목은 둘레가 한 아름 그리고 세 아름 정도 되는 팽나무 2그루가 나란히 서 있으며 50cm정도 거리에 인공적으로 다듬어진 가로 90cm, 세로40cm 크기의 상석이 놓여 있다. 이 마을의 당산제(당산지)는 금강리가 터를 잡은 50년 후에야 거행되기 시작했다고
너른 들녘과 서호강을 지나 무송동 뒷산 고갯길을 치달려온 영산로 배롱나무길은 황촌고갯마루를 정점으로 잠시 숨을 고른 후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말하자면, 황촌고갯마루는 영산로의 최정상에 해당한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드디어 영산강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주 동강과 무안 몽탄을 거쳐 시종 남해포에서 흐르는 삼포강 물을 흡수하면서 거침없이 남해바다를 향해 굽이쳐 흐르는 모습이 위풍당당하다. 이 고갯길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커다란 물줄기가 서로 만나 하나가 되는 장엄한 광경을 두 번이나 볼 수 있다. 황촌마을 앞에서 서호강과 덕진강이 서로 만나 영암천을 형성하는 모습과, 금강마을 앞에서 영암천과 영산강이 서로 만나 더 큰 물줄기를 이루는 광경이 바로 그것이다. 산과 들과 강이 이렇게 절묘하게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