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 하류는 바닷물이 들락날락 했던 곳이기 때문에 어업을 전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학산면 석포(石浦)마을 이길남(71)씨도 전문 어부였다. 작은 통통배를 가지고 멀리 영광 칠산앞바다까지 고기를 잡으러 다녔다. 10여일동안 바다에서 생활을 하며 고기를 잡아 목포에서 팔았다. 석로 돌아온 배는 빈배였지만 호주머니에는 돈이 두툼이 들어있었다. 큰 돈은 아니었지만 가족들 생계를 꾸리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지금 같으면 생각하지도 못할 일을 하고 다녔지요. 그 작은배에 4~5명이 타고 칠산앞바다까지 고기를 잡으로 다녔능께하구언이 들어서면서 이씨의 생활도 완전히 바뀌었다. 배가 멀리 바다로 나갈 수 없었다. 석포앞바다에 장어도 올라오지 않았고, 숭어도 나타나지 않았다.이씨에 따르면 영산호가 완
즐거운 봉사, 뜻있는 봉사 42년... 지역화합에 앞장지난 40여년 동안 지역의 소외된 계층을 비롯해 국제사회에서 꾸준하게 봉사활동을 펼쳐 온 국제라이온스협회 355-B2지구 영암 라이온스 클럽은 올해로 42주년을 맞는다. 영암라이온스클럽은 지난 1970년 1월 광주라이온스클럽의 추천으로 박희수 회원을 초대 회장으로 발탁해 28명이 창립총회를 갖고 한달 뒤인 국제라이온스 협회로부터 헌장승인을 지역을 위한 봉사를 시작했다. 처음으로 뿌리를 내린 라이온스클럽 회원들은 봉사활동을 위해 조직된 단체인 만큼 회원들의 활동은 활발했다. 박희수 회장을 비롯해 조인환L, 김상준L, 박찬우L, 이종인L, 김만수L, 김남중L 등의 창립 집행부 임원으로서 라이온스의 초석을 마련했
하구언이 막아지고 갯벌이 사라졌지만 낙지는 영암의 영원한 마스코트나 마찬가지다. 독천의 낙지 요리는 지금도맥이 이어지고 있다. 대도시 사람들도 낙지를 즐겨먹는 것은 마찬가지다. 동아일보 1976년 1월 21일 자에는 영암낙지를 소개하면서 낙지가 서울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음식이 된 이유가 적혀 있어 관심을 끈다. 신문에 따르면 도시민들이 실낙지 수요가 폭증해 영암일대의 낙지잡이 어민들이 큰 소득을 올리고 있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72년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나서부터 일어난 현상이라고 했다.호남고속도로를 통해 싱싱한 실낙지가 산채로 서울에 상륙하면서 서울의 낙지 수요가 폭증했다는 것이다. 서울 무교동의 유명한 낙지골목도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된 얼마후 생겨났다고 한다. 신문은 낙지잡이로 큰 재미를 보고
나불도에서 강변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고속도로 공사현장을 만난다. 목포~광양 고속도로다. 우람하게 서 있는 교각 주변에 집이 몇채 보인다.마을이라고 할 것도 없이 집들이 뛰엄뛰엄 서 있다.이곳이 바로 삼호읍 동호리감치란 곳이다. 한때 영산강 하류에서 가장 큰 선창이었던 곳이자 이웃한 독천시장의 물량이대부분 거쳐가던 곳이다. 영산강 하구언 완공 후 가장 큰 변화를겪은 곳을 말하라고 하면 단연 감치마을을 꼽지 않을 수 없다.담양 추월산을 출발한 영산강은 하류로 내려오면서 수 많은 지류와 만난다. 각 지류에서 유입되는 수량은 영산강을 풍성하게 하며 바다를 향해 흐른다. 영산강물이 바다로 들어가기 직전에 만나는 지류중의 하나가 바로 학산면 독천에서 내려온 망월천이란 하천이다. 영산강과
1981년 2월 28일 오후 영산강하구언 공사현장. 초속 4m의 세찬 물살이 쉬~익 용트림을 하면서 마지막 숨을 거둬들였다. 영암군 삼호면 삼호리와 무안군 삼향면 옥암리를 잇는 4.35㎞ 하구언 제방이 막 이어진 순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의 일이다.수천년 동안 쉬지 않고 영산강으로 들락날락하던 바닷물이 막아졌다. 삼호면 주민들과 삼향면 주민들은 최종 물막이 공사가 성공하는 현장에서 서로 얼싸안고 만세를 불렀다. 당시 언론들은 천형(天刑)의 땅이 낙토(樂土)현장이 됐다 고 표현했다.그럴만도 했다. 영산강 하구언 공사는 영암과 목포, 무안, 나주, 함평 등 영산강 유역지역의 역사(歷史)를 바꾼대 역사(役事)였다. 당시 영산강 유역은 상습적인 한해와 홍수를 겪고 있었다. 이일대의 연강 강수량은
상록회의 사회공헌활동은 남다르다. 사회공헌에 대한 각계의 관심이 고조되면서 무늬 만 치중하는 일부단체와는 달리 상록회의 사회공헌 활동은 체질화돼 있다. 일회성이 아닌 영속성을 지향하며 전 회원이 참여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실천하고 있다.이에 대해 최 회장은 봉사도 그냥 봉사가 아닌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진정한 봉사라 할 수 있다 며 지역의 어려운 이웃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더 어렵고 힘든 이웃을 찾아 봉사하는 것이 상록회가 해왔던 활동들이다 고 소개했다.이어 최 회장은 상록회의 봉사는 단순히 일회성 봉사가 아니라 주민들에게 필요한 봉사를 하고 있다 며 예를 들어 연탄전달에서끝나는 것이 아닌 연탄화로가 고장이면 고쳐주고 연탄도 전달하는 식의 방식이 그동안 상록회가 해왔던 봉사이다 고 덧붙였다.최 회장
40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며 지역사회의 봉사자로 앞장서고 있는 영암상록회.상록회의 태동은 넉넉지 않았던 시절에도 불구하고 초대회장 최철환 씨를 주축으로 24명의 회원들이 지난 1978년 영암군청 회의실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내 고향 발전을 위한 봉사의 뜻을 모았다.단체 설립 후 최철환 초대회장은 상록회의 봉사의 뿌리가 내려질 수 있도록 3년 동안 회장을 맡으면서 지역아동보호시설인 영애원에 위문품 전달, 풍수해 당한 학산면에 금일봉 전달하는 등 상록회 봉사의 초석됐다.이후 상록회는 지역의 불우이웃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도움을 손길을 건네는 일을 쉬지 않았다. 일반 개인에서부터 단체, 농촌 일손 돕기, 교사, 군부대 등 상록회 지역에서 상록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1978년 우리 영암에서는 전국에서 가장 재수좋은 사람이 탄생했다. MBC라디오가 수출100억달러 달성을 기념해 마련한 특집방송에서 퀴즈를 내고 특등상품으로 포니 승용차를 내걸었는데 영암 덕진면 장선리 3구에 사는 한상열씨가 대상의 영예를 차지한 것이다.당시만 해도 포니승용차 한 대는 꿈의 상품이여서 전국에서 51만1천562통이 옆서로 응모해서 우리나라 방송 사상 최대 경쟁률을 보였다추첨은 78년 1월 10일 '이밤을 즐겁게' 란프로그램에서 공개적으로 진행됐는데 전라도 끝 영암땅에서 주인공이 나온게 단연 화제였다. 특히 전국에서 가장 행운이 많은 사람이 된 한상열 특등 당첨자는 당시 18세로 영암 종합고에 재학중인 학생이어서 더 큰 관심을 받았다. 경향신문 1월 11일자에는 이 일을 상세하게 다루고
1010년 어느날 밤 고려 현종 임금은 꿈을 꾸었다.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지금 빨리 바다를 건너 피신하라고 했다. 현종은 밤중에 바다를 건너 목숨을 구했다. 현종이 잠을 자며 꿈을 꾸었던 곳이 영암 시종면 옥야리 남해포였고, 밤중에 바다를 건너 닿은 곳이 무안군 몽탄이었다. 현종은 거란족이 쳐들어와 남쪽으로 피신중이었다.훗날 현종은 남해포에 남해신당을 짓게하고 자신을 구해준 남해신에게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 제사는 영암과 강진, 나주, 영광, 함평의 수령들이 돌아가면서 지내게 했다. 남해포에 지금도 남해신사가 있다.남해포에서 동쪽으로 1㎞ 정도 떨어진 옥야리 야산. 10여개의 커다란 무덤들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옥야리 고분군이다. 옥야리 주민들은 어릴적에 눈이오
남송마을의 입구에 들어서면 약 3m 남짓한 대형 마을비석이 마을을 찾는 이방객들을 맞이한다. 비석이 표시하는 곳으로 들어서면 200년이라는 수령에 약 15m의 높이를 자랑하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세워져 있고 마을회관과 보건진료소 등이 나란히 세워져 있어 적지 않은 마을 규모를 짐작케 한다. 남송마을이 속한 금정면은 영암에서도 남쪽에 위치한 탓에 가장 먼저 봄이 찾아 오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남송마을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마을회관. 마을회관에는 8명의 여자주민들이 모여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인기척이 들리자 마을주민들은 반갑게 맞았다. 넉넉한 인심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마을에 대해 묻자 조귀님(여 76)씨가 말문을 열었다. 엷은 미소를 보이며 조씨는 "맨당 여자들하고 노인
지난달 29일 오후 영암군 삼호읍 용당리 구 선창마을 입구. 승용차를 타고 직선도로로 들어가자 군인들 길을 막았다.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어 민간인들은 더 이상 들어 갈 수 없었다. 이곳이 바로 영암과 강진, 장흥, 해남, 완도등 5개 지역 사람들이 목포로, 또는 서울로 가던 관문이었던 선창마을이다. 1978년 영산강 하구둑이 설치된 후 수백년 동안 이어오던 선창의 기능은 멈춰섰다. 사람들은 차량을 이용해 하구둑을 건너 목포를 오갔다. 2007년에는 해군시설이 들어오면서 이곳을 지키며 살던 주민들도 뿔뿔히 흩어졌다. 5대 관문(5개 지역 주민들이 이용하던 통로)으로 통하던 선창마을은 영영 역사속으로 사라졌다.영암과 강진, 장흥, 완도등의 나이 지긋한 주민들은 용당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용당에서
홍암마을로 더 잘 알려져 영암 공설운동장을 지나 영암읍 대신리를 벗어나면 바로 노송리3구다. 영보 방향으로 잠시 가다보면 오른편으로 시멘트 포장이 된 좁은 협로가 보이고 길 입구에 ‘노송리3구 홍암ㆍ부항마을’이라는 표지석을 만나게 된다. 표지석의 홍암마을이 노송리3구의 중심마을인 압곡마을이다. 표지석에서부터 마을까지의 거리가 짧지 않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따라 거의 2㎞를 들어가야 마을을 만날 수 있다. 마을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은 이 길 외에 두세 곳이 더 있지만 그나마 이 길이 가장 가깝고 포장도 잘 돼있다. 그 만큼 압곡마을은 어찌보면 숨겨져 있는 마을이다. 숨겨져 있는 마을답게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있는 마을 풍경은 포근한 정취를 보여준다. 압곡(鴨谷)이란 이름은 이
각시바위의 전설2004년 1월 준공한 송내ㆍ외마을 마을회관 앞에는 마을 유래에 관한 설명이 담겨있는 표지석이 있다. 이 표지에는 “거창 신씨 신영명이 15세 때 진사에 급제하고 그해(1474년) 송내에 입향했는데 그 때 지금의 정문등에 350여년 된 정문을 보고 소나무 북쪽을 솔안마을(松內), 남쪽을 솔밖마을(松外)로 명명했으며...” 라고 설명돼 있다.그런데 이 설명은 1438년 연촌 최덕지(崔德之) 선생이 심었다는, 현재 마을 한가운데 있는 팽나무 부근의 소나무 두그루를 기준으로 솔안마을과 솔바깥마을로 구분했다는 문화원 발간 ‘영암의 땅이름’의 내용과 다소 차이가 있다. 주민들은 여러모로 봐서 마을회관 표지의 설명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라는 의견이다. 다만 마을 이름을 최덕지 선생이 명명했을 수는 있다
최덕지 선생의 소나무로 마을이름 구분영암읍에서 영보리 방향으로 중간쯤에 좌측으로 송내제가 있고 이 저수지 좌우로 마을이 형성돼 있는데 이 마을이 송내ㆍ외(松內?外)마을이다. 송내와 송외마을은 수령 2~300년 정도로 추정되는 현재 마을 한가운데 있는 팽나무 부근에 있었다는 1438년 연촌 최덕지(崔德之) 선생이 심은 소나무 두그루를 기준으로 솔안마을과 솔바깥마을로 구분돼, 지금까지 송내ㆍ외마을로 부르고 있지만 실상 이러한 마을 구분이 명칭 외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고 마을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우람하고 고고한 자태를 뽐냈었다던 그 소나무들은 벌써 오래 전에 사라져 그 위치만 가늠할 수 있을 뿐 지금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송내마을을 노송리의 으뜸되는 마을로 꼽는 이유가 3구로 이뤄져 있는 노송리의 가운
거창 신씨 집성촌, “마을총각 장가 좀 보내 줘”최근 조성된 마을이 아닌,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는 마을. 현재까지도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고 마을의 이름도 분명한데 마을 이름의 유래를 알기 어려운 마을들이 있다. 덕진면 노송리 1구 노노동(老老洞)마을도 그런 마을에 속한다.노송리라는 마을이름은 노노리의 노(老)자와 송내의 송(松)자를 따서 만들어졌음이 틀림없는데 노노동이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는 다양한 설만 있을 뿐 명확하게 정리된 내용이 없다.문화원의 ‘영암의 땅이름’에는 “노로동, 노노리(老老里)라고도 하며 노송리 솔밭 밖에 있다하며 노로동이라고 불리운 한편 장수(長壽) 노인이 많다하여 노노동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고 기술돼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설득력이 약하다는 심중을 확인시
-영암의 또다른 아름다운 길-영암에는 전국 12대 아름다운 길 가운데 하나로 선정된 ‘백리 벚꽃 길’이 있다. 영암읍 버스터미널 앞 로터리에서 시작하여 독천까지 이어지는 819번 지방도이다. 월출산 자락을 끼고 이 마을 저 마을을 굽이돌아 이어지는 이 길은 해마다 4월 초가 되면 연분홍빛 왕벚꽃이 활짝 피어 봄을 부르고 이어서 상춘객들까지 불러들인다. 영암에 많은 길이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 벚꽃 길 외에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와는 별도로 영암의 숨은 비경을 간직하고 있는 길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배롱나무 가로수가 아름다운 ‘영산로’이다. 영암고을을 대표하는 마을도 마찬가지이다. 영암에 많은 마을이 있지만, 군민들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는 몇 개의 마을을 빼고는 다른 마을에 대해서 별 관심이
1. 아홉수에 걸리면 누구든지 그러하겠지만, 스물아홉 나이가 되던 해 나 역시 몹시 외로웠다. 스물아홉! 청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20대의 끝에 선 것이다. 아쉽고도 아쉬운 마음과 더불어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아 정말로 가는구나. 나의 20대가 이렇게 허무하게 가는구나. 이제는 나도 그토록 멀게만 느껴졌던 서른 줄에 다가서는구나. 갑자기 황량한 바람만 부는 사막 한 가운데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 엄습해왔다. 한 번도 진지하게 뒤돌아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황량한 벌판 가운데에 혼자 외롭게 서있는 것이었다. 말할 수 없는 회의감과 자괴감이 몰려왔다. 치열하게 살고 싶었는데. 뒤돌아보며 후회하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는데. 도무지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가장 소중한
견인 지역 詩 / 조 정 병원 앞길이 소란했다 끌려가기를 거부한 여자를 용의주도하게 끌고 가는 남자처럼 견인차들이 줄줄이 차들의 멱살을 잡아챘다 이 많은 차들이 경고를 무시했다 여차하면 끌려가기 십상인 걸 알고도 모르는 척 적당히 자리를 잡거나 견디는 데까지 견디라는 말로 읽기도 했다 삽십 년을 견디어도 모자라는 셈이 있었다 이혼하는 날 아침에 쓰러져버린 남편의 엉덩이를 들고 기저귀를 갈며 여자는 한숨을 쉬었다 등 돌리는 자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면 이기게 되어 있다 되찾아온 차 운전석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내내 여자와 나는 구두 속에 든 발을 꼼지락거리며 벌금고지서를 읽었다 제 몫의 벌금을 내야 사는 일이 끝난다고 읽었다 벚나무는 연신 꽃을 떨어뜨려 땅에게 바치고 있었다 - 시집 '이
인근 문수포 뻘낙지 주산지 독천5일장 명성‥지금도 낙지요리집 수십곳 성업 작년 거점면소재지 마을종합개발사업 선정‥낙지거리 재정비 옛 명성 회복 노력 폭설이 내리면 詩 / 최홍윤 폭설이 내리면 아무도 찾지 않는 장작불 지핀 초가집에 가서 아랫목에 배붙이고 군고구마 까먹으며 시를 써야겠다 오늘 내리는 눈이 내일도 내리고 한 댓새 내려 그리움만 날아드는 산골짝 경계가 사라진 논, 밭두렁에 강아지처럼 뒹굴어 보고 싶다 어스름 녘에는 처마 밑에 허기진 새떼가 올테고 내 어린 시절 가난의 추억이 새록새록 날아들 거다 간혹 들리는 산짐승 울음에 생의 의미를 깨달으며 꺼져가는 촛불의 심지를 돋우며 시를 쓰는 거다 눈밭에 사슴 같이 기진맥진해 돌아오면 아내가 김치 볶음밥 지질
#영복과 구흥이 합쳐진 영흥마을 광산마을에서 독천방향으로 100m 정도 직진하면 영흥마을이 나온다. 원래 영복촌과 구흥리를 합하여 영자와 흥자를 따서 영흥리라고 했다. 마을 앞으로는 망월천이 흐르고 주변에는 너른 들이 펼쳐져 있다. 마을 뒤로는 은적산 지류인 개골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남향한 마을이라 겨울이라고 해도 햇볕이 따뜻하고 기운이 온화하다. 영흥마을 주민 고송삼(90)옹은 마을의 역사와 유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1910년대까지 광산마을 앞은 바다였다. 마한과 백제시대에는 광덕동이라 했고, 고려 성종 때 이후로 광산동이라 했다. 구령, 원광산, 샘청, 솔청, 곰몰 등을 합하여 광산동이라 하였다. 구한말 1914년에 원광산, 샘청을 합하여 광산(光山)이라 했고, 솔청은 영복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