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호읍 난전리 대불하수처리장내 유휴부지에 연간 876㎾ 규모의 전력생산이 가능한 신재생에너지단지가 준공하고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갔다.이 단지는 지난 2010년 지방보급 공모사업에 선정돼 총사업비 27억원중 13억 5천만원을 지원받아 이뤄진 사업으로 750㎾ 규모의 풍력시설과 126㎾ 규모의 태양광 시설을 갖춰 전력 생산을 통해 연간 2억여 원의 예산을 절감할 수 있게 됐다.이번에 준공된 신재생에너지 단지에는 크게 태양열발전 설비와 풍력발전설비 2가지로 나눠져있다. 태양광발전설비는 개당 400W정도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4m정도 너비의 태양전지판이 120여개가 연결돼 있어 낮시간 중에서 4~6시간정도 가동을 하고 있다. 햇빛이 강하게 드는 봄이나 가을철에
우리 영암군에는 성씨가 몇 개나 될까. 1998년 편찬된 영암군지 자료에 따르면 영암군에는 91개 성씨가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성씨는 91개 였지만 본의 수는 278개에 달했다. 지난 14년 동안 인구이동이 많았기 때문에 성씨의 숫자는 줄어들거나 늘어나거나를 반복해 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우리나라에는 약 258개 성씨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영암에서 우리나라 전체 성씨의 약 30% 정도가 살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258개의 성씨는 중국의 10분의 1수준이다. 일본에는 10만여개의 성씨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암의 성씨중에 본이 가장 많은 곳은 김씨였다. 영암에 살고 있는 김씨의 본은 31개였다. 김씨에 가장 많은 가구를 가지고 있는 성은 김해김씨로 1천636가구가 거주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가운데 덕진면의 산자락 곳곳에는 내린 눈이 남아 하얀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하늘이 잔뜩 찌푸린 가운데 9일 덕진면 노송1구 노노동마을을 찾았다. 노노동 마을은 영보풍향제가 열리는 영보정에서 금정면 방면으로 약 1㎞정도를 가다보면 우측에 마을표지석이 자리하고 있다. 표지석으로부터 약 500m 가량을 차량으로 더 이동하자 오래돼 보이는 마을회관과 정자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다.마을회관안에는 마을주민들이 모여 간단한 과자를 함께 나눠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갑작스런 낯선 사람의 방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반갑게 맞으며 마을에 대한 소개를 상세히 알려주었다.마을주민 양삼례 씨는 "우리마을은 마을 뒤로는 천지봉과 앞쪽으로는 넓은 논밭이 펼쳐져
1967년 9월 16일 경희대학교 박물관팀은 시종면 내동리 초분골 뒷산에서 고분을 발굴하고 있었다. 채병서 교수와 10여명의 경희대 사학과 학생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왠만한 고분은 도굴이 심해서 이들이 발굴중이던 7호 고분도 여기저기가 상처투성이었다. 한참 발굴이 진행중이던 조사자의 삽 끝에서 눈에 익은 토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옹관(甕棺)이었다. 옹관은 토기로 만든 관(棺)을 말한다. 옹관은 이미 우리나라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된 터여서 당시에도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십기가 전시될 정도였다.그러나 옹관 주변을 조심스럽게 파내려 가던 연구원들은 끝이 보이지 않은 옹관의 규모에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까지 발견된 옹관의 규모는 커 봐야 길이가 1m 정도가 전부였다. 중앙박물관에 전시
이번에 고대 일본식 무덤인 전방후원분에서 50여개의 하니와란 일본식 토기가 나온 시종면 태간리 자라봉고분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시종면 옥야리 산 159-2번지에는 장동방대형고분이라 이름 붙여진 큰 무덤이 있다. 방대형고분이란 아랫부분을 정사각형에 가깝게 모양을 잡아 위쪽으로 쌓아가는 기법의 고분을 말한다.2010년 10월 문화재청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조사한 결과 이곳에서도 분구와 고분 주위를 두르는 도랑에서 하니와(고분 내외부에 열 지어 세워놓는 의식용 토기)로 불리는 원통형 토기가 다량 출토됐다. 학자들은 장동방대형고분의 조성연대를 6세기로 보고 있다. 6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는 태간리 자라봉고분과 조성연대가 비슷한 것이다. 이는 시종면 일대가 6세기를 전후해서 어떤 형태로든
시종면 태간리 자라봉고분 형태인 전방후원분은 서기 3세기 중엽~6세기 후반에 걸친 일본 고대국가 형성기에 조성된 독특한 형태의 무덤이다. 장고처럼 생겼다고 해서 장고분이라고 불렀으며 일본 용어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이 무덤은 1983년까지 오직 일본에만 있는 무덤으로 통용됐다. 우리나라에서 이 무덤이 발견된다는 것은 일본이 한반도 지배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당시 역사학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우리학계에서 전방후원분이 처음 보고된 것은 1972년이었다. 모 일간지에 당시 고려대 박물관 주임으로 근무하고 있던 윤세영이 ‘한국속의 전방후원분’이란 제목으로 기고문을 실었다. 당시 주장으로 고고학계는 벌집을 쑤셔 놓은듯 아수라장이 되었다. 긴급히 문화재위원회까지 열렸다. 서기 3세
23일 2차 발굴조사 결과가 나온 시종면 태간리 자라봉고분은 지난 91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굴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었다. 그러나 자라봉고분은 20여년 동안 땅속에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그 이유중의 하나는 전방후원분이 전형적인 왜식(倭式) 고분양식이기 때문이었다. 또 이곳에서 왜식 토기가 출토돼 이 무덤이 일본이 주장하는 임라일본부설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학계의 우려가 컸다.80년대 초반부터 영산강 주변에서 10기 이상이 발견되고 있는 전방후원분은 4세기 후반부터 6세기후반까지 일본이 영산강 일대를 지배한 증거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후 우리나라와 일본학자들은 전방후원분이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고대고분 발굴 발표현장에 갈때마다 궁금한게 한가지 있다. 왠만하면 한문이나 현대말로 풀어쓰는 문화재 용어중에 ‘하니와’란 일본말이 등장하는게 그것이다. 한일 역사학계가 자신들의 우월성을 치열하게 주장하는 대목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니와라는 일본말은 우리 역사학계에서 마치 고유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는 듯 하다.지난 23일 시종면 태간리 현장에서 열린 자라봉고분 발굴현장에서도 그랬다. 발표장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하니와(埴輪)란 50여점의 일본식 토기였다. 붉은 빛을 띠면서 마치 빗살무늬토기 모양을 하고 있지만 중간에 턱 처럼 생긴 띠(돌대)가 두 개씩 있는게 하니와의 큰 특징이다. 다시말해 무덤의 주인공은 6세기경 하니와라는 일본식토기를 사용한 사람이었던 것이다.하니와
대불산단 대부분의 중소업체들이 조선블럭을 만드는데 열중하고 있지만 독자적인 기술을 가지고 대형 플랜트산업에 뛰어든 업체들도 있다.지난 2001년 창립한 대불산단내 (주)한영산업은 초창기 100억원이던 매출액이 2009년에 600억원으로 상승한데 이어, 올해는 1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최근 3년 동안 400억원이 뛰어오른 것이다.자체인원 65명(협력사 포함 300명)의 중소기업이 이처럼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플랜트분야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이 회사는 대형 조선블럭을 생산하면서 한편으로 해양구조물 접안설비와 강구조물 제작및 설치, 초대형 크레인 제작등의 기술을 축척해 왔다. 초창기 투자비용이 막대하지만 일단 자리 잡으면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
선박부품업체 (유)성문 선박부품을 생산하는 대불산단내 (유)성문(대표이사 이재홍)은 2009년도 직원이 4명에 불과했다. 생산액은 연간 2억5천만원이었다. 공장도 작은 규모의 임대공장에서 세를 살았다.그러다가 지난해 이 회사의 인원은 지난해 9명으로 늘었고 생산액도 9억4천9백원으로 폭증했다. (유)성문의 성장은 눈부시다. 올해 7월 임대공장 신세를 면하고 500평 규모의 새 공장으로 이사를 했고 직원은 50명이 됐다. 올 생산 계획은 20억으로 잡고 있고, 내년도 생산액은 80억원으로 목표를 세웠다.이처럼 (유)성문이 급성장을 하고 있는 배경에는 클러스터 활동을 통한 지속적인 기술개발이 자리 잡고 있다.중소기업의 가장 큰 취약점은 기술개발 비용이 없다는 것. 조
다음은 지난 2일 목포신안비치호텔에서 전남도와 한국산업단지공단이 공동주최한 ‘한국해양산업 육성 정책포럼’의 요지이다. 이날 정책포럼은 앞으로 대불산단이 추구해야 할 업종다변화와 관련해 우리 영암지역이 관심을 많이 기울여야할 내용이 많았다.■ 해양스포츠를 통한 서남권 해양관광산업 발전전략 - 지삼업(부경대 해양스포츠학과 교수)우리나라는 도시화의 가속화, 개인소득의 증가, 마이카시대의 일반화, 사통팔달의 교통망에 의해 어느지역에서나 최대 2시간이면 바다로의 접근이 가능한 곳이다. 주2일 휴무제 전면실시에 따른 개인 여가시간 증대와 아열대성기후로의 심화발전에 따른 해양스포츠 활동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해양스포츠산업과 해양관광산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대불산단 전봇대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2008년 취임 초기던 이명박 대통령이 개혁대상 대표사례로 꼽은 것인데, 대불산단에 전봇대 몇 개가 이전되지 않아 공장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였다.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전봇대는 금방 이전되었고, 업체들의 불편도 없어졌다. 이것이 소위 ‘대불산단 전봇대 사건’이다.요즘에 대불산단에 가면 배를 만드는 조립용 블록을 싣고 온 도로를 점유하며 움직이는 초대형 운송차량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이런 운송차량이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도로를 막고 있던 전봇대를 제거해서 가능한 일이 됐다.그러나 전봇대 사건은 대불산단에 아이러니한 측면이 없지 않다. 앞서 설명했듯이 대불산단은 자동차, 화학, 기
대불산단과 현대삼호중공업이 있는 삼호읍에서 영암군이 거둬들이는 지방세는 연간 500억원에 달한다. 이중에서 100억원 정도가 현대삼호중공업에서 나오는 것이고 나머니 400억원은 대불산단에서 받는 것이다. 현재의 영암군 지방세 수입을 획기적으로 올리는 방법은 없을까. 대불산단내 업체들이 매출을 늘리게 하면 될 일이다.그러나 현재의 대불산단 입주업체들은 조선부품 조립분야에 지나치게 집중돼 있어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대불산단이 변하고, 아울러서 영암군도 지방세 수익을 크게 높힐 방안을 5회에 걸쳐 찾아본다.지난 20일 오후 대불단지내 한 제조업체. 넓은 마당에 철판들이 널려있고, 공장안에서는 배를 만드는데 필요한 대형 블록이 만들
도갑사에서 대웅전을 돌아 등산로로 접어들면 조금 올라가 도선국사수미비를 만난다. 이곳에서 200m 정도 올라가면 좌측으로 수풀이 우거진 작은 지대가 있다. 주변에는 큰 나무들이 자라기 때문에 일반 숲과 금방 구분되는 곳이다. 도갑습지다. 크기는 길이 60여m, 폭 70여m다. 이 작은 습지에 산림청 희귀 및 멸종위기식물인 끈끈이주걱, 이삭귀개, 땅귀개가 살고 있고, 환경부 지정 멸종 위기 및 보호종인 잠자리난초, 닭의 난초, 은대난초 등도 서식하고 있다. 월출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가 지난 2002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도갑습지에서만 54과 112속, 136종 등 154종류의 식물상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히 식물의 보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
오래전 영암 북쭉지역 주민들은 식수를 확보하는 게 큰일이었다. 주변에 큰 산이 없고 야산뿐 이여서 샘물이 있는 곳이 귀했다. 도포면 약천마을 역시 주변에 큰 산이 없는 곳이다. 그러나 이 마을의 샘물은 말라본 적이 없다. 지금 마을에는 네 가구가 살지만 한때는 100여 가구가 모여 살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샘물에 의지했다. 식수뿐 아니다. 가뭄이 들면 마을 주변의 논밭에 물을 공급해 주는 곳도 샘물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앉은뱅이가 이 마을의 샘물을 먹고 벌떡 일어나 걸어갔다고 해서 ‘약천(藥泉)이라는 마을이름이 붙게 됐다.지금도 샘물은 모양이 그대로 남아 있다. 물론 수돗물이 들어온 이후부터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 웬만한 샘터는 몇 년 사용하지 않으면 각종 쓰레기와 수초 등으로 뒤덮여 오
29일부터 왕인국화축제가 열리는 왕인유적지는 언제부터 공식화됐을까. 왕인박사는 일본에서 유명 인사였지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인 기록이 없었다. 그래서 왕인박사는 영암에서 많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국내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왕인박사에 먼저 관심을 보였던 곳은 일본이었다. 일본에는 고대 사료인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백제 17대 아신왕 14년인 서기 405년 백제인 왕인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는 역사 기록이 있다. 내선일체를 주장하던 일제는 한국을 침탈한 직후인 1899년에 이등박문이 앞장서 왕인현창회를 설립하고 대판에 왕인묘역을 신축했다. 이어 1937년에는 동경우에노공원에 박사왕인비를 세우면서 일본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강진에서 고려청자의 꽃을 피웠던 청자는 갑작스럽게 형태를 알 수 없도록 사라진다. 이런 형태에 대해 설득력을 얻는 부문이 억불정책과 연관성이 확인된다. 당시 고려시대 승려의 신분은 왕족의 다음 신분으로 도자기의 역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불교의 역사가 조선시대에 들어서 사라지면서 청자도 쇠퇴기를 걸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강진의 고려청자가 활발하게 모습을 드러 낸 시점에 장흥지역에서도 청자의 모습들이 나오고 있다. 장흥지역의 도요지는 총 50여개에 달하고 있다. 산악지역에 21개, 평야지역에 4개, 해안지역에 19개가 몰려있다. 청자가 발견된 곳은 용산면 풍길리와 회진면 회진리 가마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두 곳의 공통점은 주로 해안가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구림도기의 우수성은 남도의 곳곳으로 이어졌다. 남도도자기는 구림도기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진화했다. 구림도기의 전통가마의 형태나 도기를 만들때 나타나는 받침의 형태로 모두 구림도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영향은 구림도기에서 해남군 화원가마터에서는 쉽게 나타났다. 굽는 기법이 구림도기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조개껍질을 받쳐서 사용하는 전통기법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고 도기의 문양도 주판알형유병 등 영암 구림도기의 문양이 나타난 점을 들 수 있다. 가마의 형태도 고정식인 대형 가마의 형태인 벽돌식 가마가 아닌 규모가 작고 쉽게 옮길 수 있는 토충요의 형태를 띄고 있다. 가마의 크기는 크지 않고 열 손실을 최대한 줄이면서 환원작용을 할수 있도록 만든 전통가마의 형태가 구림도기를 그대로 담고
구림도기는 해남으로 건너가 초기 청자의 모태가 된 것으로 보인다. 구림도기는 청자의 발전되는 형태와 옹기의 출발점으로 시작됐다. 처음 도기에 유약을 발라 시도된 점과 환원을 시키는 방법 즉 가마를 이용해 구워내는 방법이 남도의 도자기 사에 남을 새로운 형태의 시도였다. 이런 구림도기가 어떻게 진화했을까? 지난달 2일 해남에서는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과 역사문화학회가 공동으로 해남화원 초기청자 가마터의 성격과 해양교류 주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번 학술대회의 중요한 요지는 청자의 발전상인 청자로드의 재발견이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초기청자의 발생지인 해남군 화원면 일대의 초기청자 가마터를 소개하면서 초기청자의 발생지가 영암의 구림도기에 시작됐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해남에는 화원과 산이면에 대규모
⑥물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도포면 도포리 '통샘'을 보면 과연 물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주변에 높은 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반경 4㎞내에서 높은 산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도포리 통샘은 결코 마른 적이 없다. 더구나 통샘주변은 일제시대까지 바다였다. 짠물이 수시로 드나드는 바로 곁, 그저 야산만 턱하고 버티고 있는 귀퉁이에서 깨끗한 생수가 사시사철 솟고 있다. 통샘은 수돗물이 보급되기 전까지 수백년 이상 도포사람들의 생명줄이었다. 조그만 샘에 100가구가 넘은 주민들이 식수를 의지했다. 주민들은 매일 일어나면 통샘에서 물을 길러 오는게 큰 일과였다. 물은 결코 마르지 않았지만 양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줄을 서서 조금씩 물을 떠 담았다. 한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