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왕인 띄우기일제는 내선일체 정책을 통하여 조선인들을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서 여러 가지 공작을 벌였는데 그중 하나로 왕인박사를 모델로 삼는 것이었다. 강제병탄 직전인 1894년부터 1945년 패망할 때까지 왕인박사 띄우기 사업을 약 50년 동안 국가 프로젝트로 진행하였다. 왕인묘역 확대정화공사(1899), 왕인신사봉찬회의 결성(1927), 박사왕인비 건립(1940) 등 세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서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왕인묘역 확대정화공사1894년 명치 천황 때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과 야마가타 아리
앞서 살핀 국정 교과서 체제인 1999년 제정 교과서는 몇 가지 서술의 특징이 있다. 먼저, 삼한의 형성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한반도 남부에 성립된 진국에 고조선의 유이민 세력의 이동으로 진국이 해체되면서 마한·변한·진한이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유이민 이동과정에서 삼한의 성립을 설명한 기존의 이해를 답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가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의문이다. 한반도 중남부에는 기원전 2세기 이전에 이미 한(韓)이 성립되어 있었다. 그것은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 쫓겨 남쪽 한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때가 기원전 1
해양 생태의 보고, 갯벌“와, 여름이다!!!” 차가운 에어컨 바람보다 얼굴에 살랑살랑 스쳐 가는 자연의 바람이 그리운 여름날. 방학을 맞은 아이들은 어서 빨리 산으로 바다로 떠날 시간만 손꼽아 기다리며 오랜만에 만나게 될 친척들과 재회를 손꼽아 기다린다. 산도 좋고, 계곡도 좋다. 그러나 ‘여름’ 하면 뭐니 뭐니 해도 푸른 바다가 최고 이번 여름은 특별히 ‘생태계의 보고’이자 살아있는 ‘자연 교과서’로 불리는 갯벌로 떠나보자.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천연 생태공원이자 천혜의 놀이터인 갯벌, 자연을 사랑하는 가장 쉬운 방법 최근 여
일본 에도시대에 등장한 왕인1,700여년 전 사람인 왕인이 언제부터 일본에서 조명을 받게 되었을까? 진짜 왕인묘는 존재하는 것일까? 갑작스런 왕인묘 스토리는 일본에서 유교가 제일 번성하던 에도시대에 꾸며졌다. 불과 300여 년 전 일이다. 에도시대 중기인 1,731년, ‘나미카와 세이쇼’라는 쿄토의 유학자가 지리서를 편찬하기 위해 오사카의 ‘후지사카’ 마을을 방문했다가 유래를 알 수 없는 자연석을 하나 발견했다. 그는 그것을 ‘왕인의 묘’라고 단정하고 자연석 옆에다 ‘박사 왕인의 묘’라고 쓴 나무 기둥을 세웠다. 이른바 ‘왕인묘 스
숲과 호수의 이름다운 조화 대한민국 중심부에 위치한 ‘괴산 산막이옛길과 괴산호’는 속리산 국립공원과 백두대간이 인접하고 있으며 환경부에서 지정한 생태관광지로서 훼손되지 않은 우수경관을 간직하고 있다. 이곳은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사오랑 마을에서 산막이 마을까지 연결됐던 10리의 옛길로, 흔적처럼 남은 길에 덧그림을 그리듯 그대로 산책로를 복원하였고, 친환경 공법을 활용한 데크로 만들어져 환경 훼손을 최소화한 자연미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옛길을 따라 펼쳐지는 산과 물, 숲의 아름다움은 괴산의 백미로 손꼽힐 만하다.산막이옛길이
왕인에 대한 문헌 재고찰일본 에는 응신 20년(서기 289년)에 백제가 보낸 와니키시(和邇吉師)로, 에는 응신 15년(서기 284년)에 왜의 장수 황전별과 무별을 백제로 보내 데려오도록 한 왕인(王仁)으로, 그 이름만 기록되어 있을 뿐 왕인의 탄생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없다. 한편, 에는 왕인의 출생 가문이 기록되어 있다. “한 고제의 후손으로 앵(鸞)이란 자가 있었고, 앵의 후손인 왕구(王狗)가 백제로 옮겨갔는데, 백제의 구소왕(久素王) 때에 성조(聖朝)가 사신을 보내어 문인(文人)을 부르심으로
일본의 사서인 고사기, 일본서기에는 왕인이 ‘백제에서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왔다’는 내용이 나오고, 속일본기에는 왕인이 ‘한나라 유방의 후손인 왕구의 손자다’라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을 뿐 왕인이 구체적으로 백제의 어느 지역 출신이었다라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항일투쟁기 하에 조선에서 전라남도 영암이 왕인의 출생지라고 하는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1937년에 간행된 이병연(李秉延)의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영암군 편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 지지편 명소 성기동이 왕인의 출생지로 나오며, 인물편 중 명환(名宦)에 왕인이 소개되
필자는 지난 6월 27일 강진 유림회관에서 전남 서남부지역 유림을 대상으로 ‘화이부동(和而不同)과 4차 산업혁명’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였다. 참석자 대부분이 70대 이상 어르신들이지만 100여 명이 강당을 가득 메웠다. 이들은 필자의 낯선 주제 강의를 흥미롭게 강의 시간 내내 집중하였다. 바야흐로, 인문학이 계층과 시대를 넘어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인문학적 사고가 형성되어야 ‘직관’할 수 있고, 핵심을 찾아 ‘설명’할 수 있는 ‘용기’가 길러진다. 이러한 인문학적 사고의 토대는 학교 교육으로부터 시작된다.
지난 1년 동안 영암군은 전략산업을 육성하고, 분야별 마스터플랜을 마련해 미래 영암의 단단한 밑그림을 그렸다. 특히, 지역 현안 해결을 위해 중앙정부와 국회 등을 아우르는 광폭 행보를 펼쳐, 국책기관인 마한역사문화센터, 월출산국립공원 생태탐방원 유치를 이끌어 냈다. 마한역사문화센터는 삼호읍 나불리의 4만㎡ 부지에 국비 400억 원이 투입돼 지상 2층, 지하 1층, 연면적 1만㎡ 규모로 들어선다. 기록보관소, 문화재 전문도서·자료관, 연구·교육시설, 전시·체험관 등을 갖춘 종합문화공간으로 2027년 완공 예정이다. 2026년 군서면
왕인은 한나라 유방의 후손(?)왕인에 대한 기사가 일본 역사서인 와 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정사 중 하나인 에 왕인의 출생가문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는 일본 헤이안 시대 초기인 797년에 간무 덴노의 명으로 편찬이 시작되었는데 전반부와 후반부의 편찬이 각각 달리 진행되었다. 한국사의 통일신라와 발해 시대(남북국시대)와 겹치는 시기를 다룬 사서인데, 일본서기가 백제나 가야와 관련된 기록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면, 속일본기는 동시대에 존재한 통일신라 및 발해가 일본과 관련된 내용이
강찬원 의장: 그동안 쌀값 안정화 대책 마련을 위한 간담회와 결의안을 채택하여 정부의 대응을 이끌어 냈으며, 도시경쟁력 확보·규제혁신 적극 행정 추진 건의문을 건의하여 인구감소와 지역경제 침체에 집행부의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하는 등 민생안정에 집중했습니다. 앞으로도 군민의 대의기관이자 대변자로서 군민의 눈높이에 맞는 의정활동을 펼쳐 나가겠습니다. 고화자 부의장: 주민생활 밀착형 조례 제·개정, 고향사랑기부제의 성공 정착을 위한 실효성 있는 군정 정책대안 제시 등으로 군정의 긍정적인 영향을 이끌어 내고 신뢰도 제고에 기여하고자 최선을
제9대 영암군의회, 1년을 되돌아본다‘일하는 의회, 희망찬 의회, 청렴한 의회’를 기조로 지난해 7월, 군민의 기대 속에 힘차게 출발한 제9대 전반기 영암군의회는 개원 후 제290회 임시회를 시작으로 제299회 제1차 정례회까지 1년간의 회기 일정을 마치고 출범 1주년을 맞았다.영암군의회는 지난 1년 동안 정례회 3회, 임시회 7회 등 총 10회에 걸쳐 102일간의 회기 동안 조례안 97건, 일반안건 25건, 예·결산안 8건, 기타 건의안 20건 등 총 167건의 안건을 처리했다. 또 군정질문을 통해 지역 발전과 군민 삶의 질 향상
구림마을과 왕인 -1중국의 사서와 발굴된 유물이 말해주는 우리 민족인 ‘동이’의 고대 활동무대 –마한을 비롯한 삼한의 역사도, 백제를 비롯한 삼국의 역사도, 신라와 발해와 고려의 역사도, 조선과 대한민국의 역사도 저 강역에서 찾아야 한다. 이제 역사는 더 이상 역사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조선시대 모화사상에 빠져 고대사를 왜곡하여 우리 선조들이 경영했던 광활한 대륙의 영토를 한반도로 축소했던 유학자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조작한 식민사관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따랐던 식민사학자들과 그 후예들이 역사학계를 장악하고 왜곡된 교
견훤의 세력 기반, 영산강 유역 7년 넘게 광주(무진주)에 머무르며 반남, 나주, 광주 등 내륙 정치 세력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을 기울였던 견훤은, 무진주에서 국가를 세우는 데에 이르지 못하고 완산주(전주)로 이동하여 그곳에 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그곳에서 개국을 선언할 때 한 연설이 흥미롭다.“내가 삼국의 기원을 상고해보면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세(박혁거세)가 발흥하였으므로 진(辰)·변(卞)이 따라 일어났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에서 개국하여 6백여 년이 지났는데 총장년간에 당 고종이 신라의 청원을 받아들여 장군 소정방을
우리나라에서 5번째로 큰 섬 남해군. 육지와 섬이 다리로 이어져 있어 육로를 이용한 접근이 쉽다. 섬의 특성상 대중교통은 버스만 가능하다. 현재 경남도 차원에서 철도건설에 대해 검토를 하고 있다고 한다. 1개 읍과 9개 면으로 이뤄져 있는 남해군은 다양한 생태관광지와 이색적인 풍경의 마을이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예전에는 남해 금산, 보리암, 호구산, 용문사 등이 역사 관광지와 사찰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지금은 추세가 많이 바뀌었다. CNN이 선정한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곳 3위에 선정된 가천다랭이마을과 앵
일제 극우파와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이 120년 끌어올리는 논리일본서기 신공 55년(서기 255년)조에 “백제 초고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나온다. 한편 백제본기 백제 근초고왕 30년(서기 375년)조에 “겨울 11월 근초고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신공 9년과 신공 49년 신공황후의 황당무계한 삼한정벌론과 임나일본부설 기사에 맞추기 위해 120년 끌어올려 연대를 조작했다.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은 황당하게도 369년 백제 근초고왕이 신라, 가야를 정벌하고 남만의 침미다례를 주륙하고 마한
반남 지역과 ‘반나부리’2009년 동신대 박물관이 자미산성을 발굴하였을 때 발견된 ‘반내부(半乃夫)’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와가는 자미산성의 성격을 이해하는 근거를 제공하였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반남군은 백제 반내부리(半奈夫里)인데, 경덕왕 때 반남군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다. 같은 내용이 조선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반남폐현은 본래 백제의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인데 신라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현으로 강등되어 나주에 예속되었다.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라고 실려
계단식 농사를 짓던 곳전라북도 고창군은 유네스코가 인정한 보물 7가지를 가진 도시다. 세계유산(자연유산, 문화유산, 복합유산) 무형문화유산, 생물권보전지역과 올해 인정된 세계기록유산과 세계지질공원까지 갖추었다.운곡람사르습지 일대는 과거 주민들이 거주하며 계단식 농사를 경작하던 곳이었다. 1980년대 영광 한빛원자력발전소의 공업용수 공급을 위해 운곡저수지가 만들어졌고 그로 인해 원주민들은 경작지와 살던 집을 두고 떠나왔으며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출입이 통제된 경작지와 주변 자연환경은 인간의 접촉과 간섭이 단절되자 엄청난 변화가
이제 죽정마을을 떠나 구림마을로 발길을 옮긴다. 옛사람들은 죽정을 ‘웃사우’, 신흥동을 ‘아랫사우’라고 했으니 사실상, 이곳 죽정마을도 크게 보면 구림마을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기동에 있던 구림마을 서당(성기서재)을 죽정마을 뒷산 문수암터로 이건하여 문수서재(문산재)를 설립한 것만 봐도 죽정마을은 구림마을과 한 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림마을 사람들이 직접 쓴 책 「호남명촌 구림」에도 “옛날에는 열다섯 동네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보통 구림 열두 동네라고 불린다. 지금은 동구림, 서구림, 도갑리를 구림이라 한
마한사에 관심을 가졌을 때 필자가 생각한 가설은 영암 시종과 나주 반남 일대에 고대 마한 왕국의 중심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반남 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도 이 지역에서 자체 제작한 왕관으로 이 지역 연맹왕국 왕국의 국왕의 왕관으로 보았다. 금동관이 백제왕이 이 지역 ‘수장급 최고 우두머리’에게 준 위세품이라고 본 기존 학설을 정면 비판하였다. 때마침 발굴된 시종 내동리 쌍무덤 출토 금동관 편이 신촌리 9호분과 동형이라는 사실은 필자의 이러한 추론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해주었다. 필자는 시종·반남에 있었던 마한 왕국이 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