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6일 오후 1시 30분 시종면 복지회관에서 ‘마한 대외교역로와 영암’이라는 주제로 한·중 학자들이 모여 마한 시기에 이루어졌던 대외 교류의 양상을 밝히는 세미나가 열렸다. 특히 이날 세미나는 10월 6~7일 마한축제와 함께 열려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 영암 유치의 축하와 마한유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준비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어서 더욱 뜻깊게 생각한다. 아무쪼록, 이번 축제가 ‘마한의 심장, 영암’의 정체성이 더욱 빛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나불도는‘신의 한 수’이번에는 필자가 세미나에서 기조 발표한 ‘고대 동아시아 해양
대방과 낙랑의 위치에 대해 더 이상 논란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중국의 고지도다.(그림1)이 지도를 보면서도 대방군이 북한 황해도에 있었고, 낙랑군이 북한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그 역사학자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의 탐욕스러운 동북공정에 아주 열성적으로 부역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재의 대한민국 주류 강단사학자들은 조선의 일부 실학자들과 일제 조선총독부가 만들어놓은 식민 반도사관을 폐기할 생각을 않고 계속해서 추종하고 있다. 세계 역사상 이런 코미디 같은 자학적인 역사관은 없었다
지난 18일 ‘가야 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이미 예상한 대로다. 한국은 1995년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를 시작으로 가야 고분군까지 총 16건(문화유산 14건, 자연유산 2곳)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이번에 등재된 고분군은 ▲전북 남원 유곡리·두락리 고분군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 ▲경남 김해 대성동 고분군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 ▲경남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군 ▲경남 합천 옥전 고분군 등 7개다. 세계유산의 OUV를 지닌 영암 등 지자체 등이 이를 계기로 속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문제와 정율성 공원 조성과 관련한 논란의 본질은 역사를 당대의 눈으로 읽지 않고 현재의 시각에서 해석하는 데서 나온 혼란이다. 그리고 이 혼란을 빙자하여 상대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역사가 왜곡될 때 얼마나 무서운 결과가 초래되는가를 새삼 느끼게 한다. 이러한 사실을 익히 아는 필자는 평소에 학생들 강의 또는 대외 특강에서 “역사를 당대의 관점으로 보지 않으면 역사적 진실이 왜곡될 염려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역사를 공부하면 ‘진정한 자아’를 알게 된다. ‘나’를 안다는 것은
< 삼국지, 후한서 -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倭)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 리쯤 된다. [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세째는 변한(弁韓)인데, 진한(辰韓)은 옛 辰國이다.”그림 1은 삼국지와 후한서에 나온 내용에 맞게 필자가 대략 그려본 기원 전후의 지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준점이다. 한국 고대사의 기준점은 대방군, 낙랑군, 요동, 패수 네 가지가 있는데 대방군의 위치만 제대로 알아도 고대사의 수수께끼가 풀린다.
지난 호에 이어 중국의 옛 사서와 고지도에 기록된 사실을 근거로 왜(倭)의 위치를 고증해보고자 한다. 왜는 월왕 구천의 후예로서 삼한시대와 삼국시대 이후로 계속해서 부대끼며 살았던 이웃 종족이었다. 왕인이 살던 시대에도 백제 신라와 인접한 왜가 있었다.「서진(西晉, 265~317)은 위나라 사마의의 손자인 진무제 사마염(司馬炎)이 건국한 국가이다. 서진은 태강지리지를 편찬했다. 이 지도에는 기원전 108년에 중국 전한(前漢)의 무제가 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설치했다는 한사군(漢四郡) 중 낙랑군과 현도군이 명확하게 표시되어
지도종요 절강분계도(地圖綜要 浙江分界圖)지금까지 우리는 왜(倭)와 일본(日本)을 현재의 일본열도로만 알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조선사편수회’를 통하여 왜곡 날조한 거짓 역사를 배워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서 , 와 중국의 역사서 을 비롯한 25사(史)에 나타난 기록에는 서기 7세기 이전에는 대륙의 양자강 이남에 왜(倭)가 있었다. 중국의 여러 고지도(古地圖)에도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명나라 때 지도에는 현재의 대만이 일본(日本)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필자는 그동안 연구자들이 소홀히 한 독립운동 관련 연구도 적지 않게 하고 있어 마한사와 더불어 복수전공 연구자가 되고 말았다. 곧 지역학 연구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주제 모두 우리 지역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어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필자의 인식 폭을 넓히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영세한 사료를 정치(精緻)하게 분석하여 고대사의 틀을 세운 방법으로 근·현대사를 해석하는 방법은 매우 유효한 학문 방법이라고 스승인 김두진 국민대 명예교수님은 격려한다. 가령 이번에 보성지역 3.1운동을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를 찾았다
영암에서 날아온 한 통의 편지를 받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김창수 옹은 서둘러 영암 구림마을을 찾아온다. 다음은 그가 자신의 저서에서 밝힌 관련 내용이다. 책에 나온 원문을 그대로 전재한다.구림마을을 찾아여기에 두 차례(1972년 11월과 73년 3월)에 걸쳐 2주간 동안 현지를 답사한 기록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73년 3월 14일에 희망을 가득 안고 경쾌한 기분으로 서울역에서 목포행 태극호에 올라 곡창 김제 만경평야를 건너 영산포까지 달리고 나니 꼭 6시간, 이곳이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과의 해상교통이 편리해서 피차간 왕래가 빈번하던
김창수 옹의 「박사왕인비」 친견 소감“동경에서 여장을 풀고 아좌곡(阿佐谷) 병원장 조인제 박사의 안내로 상야(上野)공원 드높은 곳의 수목 울창한 경내에 의연하게 서 있는 두 개의 비를 찾아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훌륭한 우리 조상의 비였다. 하나는 대리석으로 높이 10여척이나 되는 정비이고 다른 하나는 5척 정도의 부비(副碑)였다. 정비에는 앞뒤로 한문 글씨가 가득 차 있고, 부비에는 일본글자로 앞뒤가 메어져 있다.(정비의 내용은 구림마을 8편에서 이미 소개했으므로 참조 바람)이 비문을 읽고 우리 선현 왕인이 얼마나 일본땅에서
일본의 왕인 띄우기일제는 내선일체 정책을 통하여 조선인들을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서 여러 가지 공작을 벌였는데 그중 하나로 왕인박사를 모델로 삼는 것이었다. 강제병탄 직전인 1894년부터 1945년 패망할 때까지 왕인박사 띄우기 사업을 약 50년 동안 국가 프로젝트로 진행하였다. 왕인묘역 확대정화공사(1899), 왕인신사봉찬회의 결성(1927), 박사왕인비 건립(1940) 등 세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서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왕인묘역 확대정화공사1894년 명치 천황 때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과 야마가타 아리
앞서 살핀 국정 교과서 체제인 1999년 제정 교과서는 몇 가지 서술의 특징이 있다. 먼저, 삼한의 형성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한반도 남부에 성립된 진국에 고조선의 유이민 세력의 이동으로 진국이 해체되면서 마한·변한·진한이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유이민 이동과정에서 삼한의 성립을 설명한 기존의 이해를 답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가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의문이다. 한반도 중남부에는 기원전 2세기 이전에 이미 한(韓)이 성립되어 있었다. 그것은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 쫓겨 남쪽 한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때가 기원전 1
일본 에도시대에 등장한 왕인1,700여년 전 사람인 왕인이 언제부터 일본에서 조명을 받게 되었을까? 진짜 왕인묘는 존재하는 것일까? 갑작스런 왕인묘 스토리는 일본에서 유교가 제일 번성하던 에도시대에 꾸며졌다. 불과 300여 년 전 일이다. 에도시대 중기인 1,731년, ‘나미카와 세이쇼’라는 쿄토의 유학자가 지리서를 편찬하기 위해 오사카의 ‘후지사카’ 마을을 방문했다가 유래를 알 수 없는 자연석을 하나 발견했다. 그는 그것을 ‘왕인의 묘’라고 단정하고 자연석 옆에다 ‘박사 왕인의 묘’라고 쓴 나무 기둥을 세웠다. 이른바 ‘왕인묘 스
왕인에 대한 문헌 재고찰일본 에는 응신 20년(서기 289년)에 백제가 보낸 와니키시(和邇吉師)로, 에는 응신 15년(서기 284년)에 왜의 장수 황전별과 무별을 백제로 보내 데려오도록 한 왕인(王仁)으로, 그 이름만 기록되어 있을 뿐 왕인의 탄생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없다. 한편, 에는 왕인의 출생 가문이 기록되어 있다. “한 고제의 후손으로 앵(鸞)이란 자가 있었고, 앵의 후손인 왕구(王狗)가 백제로 옮겨갔는데, 백제의 구소왕(久素王) 때에 성조(聖朝)가 사신을 보내어 문인(文人)을 부르심으로
일본의 사서인 고사기, 일본서기에는 왕인이 ‘백제에서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왔다’는 내용이 나오고, 속일본기에는 왕인이 ‘한나라 유방의 후손인 왕구의 손자다’라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을 뿐 왕인이 구체적으로 백제의 어느 지역 출신이었다라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항일투쟁기 하에 조선에서 전라남도 영암이 왕인의 출생지라고 하는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1937년에 간행된 이병연(李秉延)의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영암군 편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 지지편 명소 성기동이 왕인의 출생지로 나오며, 인물편 중 명환(名宦)에 왕인이 소개되
지난 1년 동안 영암군은 전략산업을 육성하고, 분야별 마스터플랜을 마련해 미래 영암의 단단한 밑그림을 그렸다. 특히, 지역 현안 해결을 위해 중앙정부와 국회 등을 아우르는 광폭 행보를 펼쳐, 국책기관인 마한역사문화센터, 월출산국립공원 생태탐방원 유치를 이끌어 냈다. 마한역사문화센터는 삼호읍 나불리의 4만㎡ 부지에 국비 400억 원이 투입돼 지상 2층, 지하 1층, 연면적 1만㎡ 규모로 들어선다. 기록보관소, 문화재 전문도서·자료관, 연구·교육시설, 전시·체험관 등을 갖춘 종합문화공간으로 2027년 완공 예정이다. 2026년 군서면
왕인은 한나라 유방의 후손(?)왕인에 대한 기사가 일본 역사서인 와 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정사 중 하나인 에 왕인의 출생가문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는 일본 헤이안 시대 초기인 797년에 간무 덴노의 명으로 편찬이 시작되었는데 전반부와 후반부의 편찬이 각각 달리 진행되었다. 한국사의 통일신라와 발해 시대(남북국시대)와 겹치는 시기를 다룬 사서인데, 일본서기가 백제나 가야와 관련된 기록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면, 속일본기는 동시대에 존재한 통일신라 및 발해가 일본과 관련된 내용이
구림마을과 왕인 -1중국의 사서와 발굴된 유물이 말해주는 우리 민족인 ‘동이’의 고대 활동무대 –마한을 비롯한 삼한의 역사도, 백제를 비롯한 삼국의 역사도, 신라와 발해와 고려의 역사도, 조선과 대한민국의 역사도 저 강역에서 찾아야 한다. 이제 역사는 더 이상 역사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조선시대 모화사상에 빠져 고대사를 왜곡하여 우리 선조들이 경영했던 광활한 대륙의 영토를 한반도로 축소했던 유학자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조작한 식민사관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따랐던 식민사학자들과 그 후예들이 역사학계를 장악하고 왜곡된 교
일제 극우파와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이 120년 끌어올리는 논리일본서기 신공 55년(서기 255년)조에 “백제 초고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나온다. 한편 백제본기 백제 근초고왕 30년(서기 375년)조에 “겨울 11월 근초고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신공 9년과 신공 49년 신공황후의 황당무계한 삼한정벌론과 임나일본부설 기사에 맞추기 위해 120년 끌어올려 연대를 조작했다.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은 황당하게도 369년 백제 근초고왕이 신라, 가야를 정벌하고 남만의 침미다례를 주륙하고 마한
이제 죽정마을을 떠나 구림마을로 발길을 옮긴다. 옛사람들은 죽정을 ‘웃사우’, 신흥동을 ‘아랫사우’라고 했으니 사실상, 이곳 죽정마을도 크게 보면 구림마을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기동에 있던 구림마을 서당(성기서재)을 죽정마을 뒷산 문수암터로 이건하여 문수서재(문산재)를 설립한 것만 봐도 죽정마을은 구림마을과 한 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림마을 사람들이 직접 쓴 책 「호남명촌 구림」에도 “옛날에는 열다섯 동네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보통 구림 열두 동네라고 불린다. 지금은 동구림, 서구림, 도갑리를 구림이라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