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도 희作
1974년 착공되어 2년만인 1976년 준공된 도갑리 저수지. 당시 1억3천800만원의 사업비가 투입된 이 저수지로 인해 군서면 죽정리는 물론 평리마을까지 가뭄에서 벗어남은 물론 주변의 밭은 논으로 바뀌어 농업용수를 공급받았다. 최근에는 긴 가뭄으로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1941년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당시 63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25정보 규모의 성양저수지 제1호, 제2호를 축조했는데 축조 때 군서면 주민이 동원되었다. 들판 넘어 멀리 성양1, 2호 저수지가 보인다.
예전에는 장례를 상가 집에서 일가친척과 마을공동체에서 담당했으나 지금은 종교단체에서 장례를 주관하는 경우가 늘고 있으며 장례식장이 생겨 무척 편리해졌다. 상여를 매는 모습도 좀처럼 보기 힘들다. 명정을 앞세우고 혼백 만장을 뒤따르는 꽃상여는 상부꾼들에게 메어져 공포(功布)의 안내를 받으며 장지(葬地)로 향한다. 상여 뒤에는 상인과 호상군들이 뒤따랐다.
김 도 희 作
1960년대의 농사일들은 모두가 수작업으로 이뤄졌는데. 홀테 이후에 나온 것이 발로 밟아 벼를 터는 일명 기계 홀테가 한때 인기를 끌었다. 홀테 보다는 훨씬 수월한데다 작업능률도 훨씬 빨라 농민들이 많이 찾았다.
예전 보리탈곡기가 보급되기 이전에는 모내기가 끝나자마자 보리타작이 시작됐다. 전에는 보리나 콩을 마당에 널어놓고 뙤약볕에 말려가며 도리깨로 타작을 했다. 4~5명의 일꾼들이 한조가 되어 선도리깨가 이끄는 대로 쫒아다니며 도리깨로 내리쳐 보리와 콩을 털어냈다.
계절은 농부의 손끝에서 바람을 타고 월출산으로 들어간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느껴오면 굳이 달력이 없어도 농부들은 처서가 왔음을 안다. 여름내 햇빛과 씨름했던 곡물을 거두는 군서면 오산마을에도 가을이 손짓하고 있다.
구림초등학교의 옛 모습 1950년 6·25전쟁 당시 화재로 교실과 부속건물이 전부 타 버려 한동안 교실이 없어 마을창고 등에 짚가마니를 깔고 앉아서 수업을 받았던 구림초등학교는 주민들의 노력으로 서호정에 교실 5칸을 마련, 수업해오다 1960년 신근정으로 이전했다. 지금의 구림초등학교 모습 지난해 100주년을 맞은 유서 깊은 구림초등학교는 일제 강점기 때 일제에 항거, 독립만세시위에 전교생이 참가하고 최규창, 최상호, 김필재, 최규문 등 민족운동가와 사회 각계에 인물을 많이 길러낸 요람으로 성장했다.
모내기 전에 논을 고르는 써래질이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보편적이었으나 모든 농작업이 기계화 되면서 지금은 사진 속에서나 볼 수밖에 없는 옛 전설이 되고 말았다. 당시 농작업에 이용된 소는 집안의 재산목록 1호이자 한 가정의 일원으로 큰 대접을 받았다.
1970년대 이앙기가 보급되기 전의 모내기는 사람의 손에 의해 일일이 수작업으로 이뤄졌다. 일시에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던 만큼 품앗이가 대부분이었고 못줄 앞에 늘어선 일꾼들은 못줄잡이의 ‘어~이 어~이’의 소리에 맞춰 모심기를 일산분란하게 했다.
1960년대 시골 5일장은 등짐장사들이 비단과 포목, 고무신, 그릇, 어물 등 주민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팔았다. 옛날에는 고무신도 기워 신었다.
1966년 5월, 2일과 7일 장으로 개설된 군서면 구림 5일장. 지금은 볼 수 없는 옹기전의 모습이 풍요로웠던 옛 시골의 정겨운 장터를 생각나게 한다.
1963년 9월 10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전국농업협동조합 경진대회가 개최됐다. 당시 경진대회 심사결과 영암구림이동조합이 1등을 차지했다. 당시 구림이동조합은 중앙 일간신문과 방송에서 취재경쟁을 벌일 정도로 전국에서 모범적인 조합으로 이름을 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