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영암읍 시가지영암읍 5일 시장으로 통하는 4거리 입구 모습.시장통 입구 왼쪽에 제일약국의 간판이 눈에띄고, 도로 양쪽으로 늘어선 허름한 상가건물들이 1960년대 당시 어려웠던 경제사정을 말해주고 있다. 2000년대 영암읍 시가지40년이 지난 오늘날 영암읍 5일시장통은 예전과 크게 다를게 없지만 상가 건물만은 현대식으로 지어져 정비된 모습이다.하지만 지속적인 인구유출로 경기가 예전만 못해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
1960년대 영암읍 시가지영암군청 소재지로 영암읍에서는 가장 번화가였던 동무리 군청입구 도로의 1960년대 모습.상여를 따라 도로 한복판을 지나는 장례행렬은 주변 사람들의 볼거리로 부녀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함께 나눴다. 멀리 월출산의 모습도 보인다. 2000년대 영암읍 시가지현대식 건물이 들어선 2000년대 영암읍 동무리 군청입구 간선도로는 주차난으로 가변주차제까지 도입됐다.질서정연하게 내걸린 상가건물의 간판과 빽빽이 들어선 2~3층의 건들은 예전 모습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를 실감하게 한다.
1970년대 영암읍 시가지영암읍 오거리 정신약국에서 동락식당으로 이어지는 1970년대 시가지 모습.다소 혼란스런 상가 간판이 눈에 띄고 새마을 사업이 한창이던 당시 시가지 정비가 이뤄지고 있어 어수선한 모습이다. 2000년대 영암읍 시가지잘 정돈된 건물 간판과 현대식 강가건물이 예전의 모습과는 매우 대조적이다.지금은 구 교육청 건물 쪽으로 순환도로가 뚫려 시내 교통 혼잡을 크게 줄이게 됐지만 여전히 주차난이 심한 곳이다.
입석마을은 태봉산 북동쪽의 밑단부에 위치하는 작은 마을이다. 입석마을에는 방형의 자석묘 상석처럼 보이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고분은 암석 마을 남동쪽의 논 가운데에 1기. 이곳에서 북쪽으로 200여m 떨어진 구릉의 경사면에 1기 등 총 2기가 있다.1호분은 일명 '자라봉'이라 불리며 해발 6-7m저도의 낮은 평지에 위치하고 있는 전방후원형분이다.1991년 강인구씨에 의해 발굴조사 되었는데 분구는 장축을 남-북으로 하여 후원부를 북쪽에, 전방부를 남쪽에 두고 있다.분구의 길이는 전장이 35m이고, 후원부의 저경은 남-북 23m, 동-서20m, 높이 5m이고, 전방부의 남-북 길이 12m, 전단(前端)의 너비 7m, 높이 2,3m 로 후원부에 비해 전방부가 덜 발달해 있다.매장 주
1970년대 영암읍 동무리영암읍 사무소를 중심으로 상가건물이 듬성듬성 보이고 뒤쪽으로는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옛 정취를 물씬 풍긴다. 2000년대 영암읍 동무리간선도로의 확장과 더불어 현대식으로 지어진 상가건물과 간판이 예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와 닿는다.
개양동 신촌교회에서 덕진면 소재지 방향도로우측 구릉 정상부에 12기 지석묘 군집 개양동 마을에 위치하는 신촌교회에서 덕진면 소재지 방향으로 300여m가면, 도로 우측으로 도로와 평행을 이루는 구릉 정상부에 12기의 지석묘가 군집한다.일부 지석묘는 주변이 깎여나가 하부가 노출되어 있는데 지석이 있거나 석실이 있다.주변에는 민묘가 조성되어 있다.
1960년대 구림 벚꽃길포장이 되지 않은 비포장 도로인 구림 벚꽃길을 아낙네들이 한복을 입고, 흰 고무신을 신고 거닐고 있는 장면이 이색적이다. 2000년대 구림 벚꽃길아스팔트길로 포장된 구림 벚꽃길을 관광객들이 벚꽃향기에 취해 거닐고 있다. 40여년이 지난 벚꽃나무가 훨씬 커보인다.
기존 조사때 마을명 오기 ‥'장등'으로 정정 장등마을 북쪽의 소로를 따라 송내마을로 500여m 떨어진 길 좌측의 밭 가운데 1기의 지석묘가 있다. 기존 조사에는 7기의 지석묘가 군을 이루고 있다고 보고되었으나 현재는 경지정리로 인하여 1기만 남아있다.상석의 규모는 190×120×50cm이고 장축 방향은 동-서 이다.이 유적은 기존의 조사에서 장동지석묘 나군으로 보고된 것인데 자연마을 명이 잘못 표기되어 장등지석묘 나군으로 정정한다.
장등마을 최북단 야산에 2열로 6기군집 장등마을 최북단에 거주하는 허연씨 축사 동쪽 야산에 6기의 지석묘가 군집한다. 군집방향은 남-북으로 2열을 이루고 있다.기존 조사에는 5기가 조사되었으나 1기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상석의 대부분이 파괴외었으며 반파된 것도 있다.
1960년대 영암시가지지금의 영암읍 오거리 인근 비포장 도로에서 한복을 입고 장례를 치르는 행렬이 이채롭다.정신약국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그 너머로 월출산이 아득히 보인다. 2000년대 영암시가지지금은 오거리로 사방으로 길이 트이고, 포장도로가 되어 차량들이 주을 지어 씽씽 달리고 있다.도로 양쪽으로는 고층건물들이 들어서 이제는 월출산이 보이지 않는다.
애송제는 남평문씨 문중제각이다. 애송재의 정확한 건립년대는 알 수 없다. 현재의 건물은 1962년에 중건한 것이다. 宋時烈과 金尙憲이 쓴 이 있는데, 원래 애송정에 있었던 것을 옮겨온 듯 하다. 이 밖에 가 있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대문은 1985년에 세웠다.(소재지 : 영암읍 장암리 616번지)
1668년(현종 9년) 鄕祠宇로 건립되었다. 배향인물로는 靑蓮 李俊白(1520-1578)과 白蓮 文益周(1535-?)를 제향하다가, 鑄洞 徐命伯(1678-?)을 추배하여 三賢祠라 칭하였다. 이후백과 문익주는 친교가 두터웠으며, 서명백은 辛丑獄事(1721년)로 장암에 유배된 인물이다. 1687년에 남평문씨는 養正齋를 건립하였고, 1778년(정조 2년) 문중재실로 이축하였으며, 1868년 서원훼철령에 의해 소실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28-1936년에 복설한 것이다. 남평문씨 명조의 문극겸(1122-1189)을 주벽으로 하여 文孟和(1433-?)와 곽추(1338-?)를 추배하였다. 1945년 이후백의 후손들이 위패를 해남군 삼산면에 있는 靑蓮祠로 옮겨감에 따라 현재 5위가 제향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마을회관 앞에 있는 재각이다. 조선조 말 김명보의 효행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건립한 재각으로 전해진다. 건립 이후 지금까지 모선강학(慕先講學) 기능의 장소로 쓰이고 있다. 정확한 건립년대는 밝혀지지 않고, 다만 1970년의 위인재기(爲仁齋記)를 비롯 1980년 하천수가 쓴 기문(記文), 그 외 차운(次韻)5개가 편액으로 남아 전한다. 건축 형태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이며, 중앙 2칸은 대청이며 양측면 1칸씩은 재실로 사용되고 있다.(소재지 : 군서면 월곡리 호동)
아천공 박응원(鵝川公 朴應元)의 정자다. 함양 박씨인 박응원은 김상헌·권필 등과 교분이 있었고, 성균 생원을 지낸 사람으로 특히 효행이 돈독했다고 전해온다. 현존하는 건물은 그의 10대손 박동섭이 신유년에 중건한 것이다. 건축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이며, 이 가운데 우측 2칸은 재실로 쓰이고 있고 나머지 좌측 1칸은 마루다. (소재지 : 군서면 월곡리 주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