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다회마을 가장 남서쪽 사면에 4기의 지석묘가 있다. 이곳은 복다회 마을에서 ‘미륵불’(복다회지석묘 가군)로 가는 농로 우측으로 복다회 유물산포지와 같은 구릉상의 사면이다. 또한 민가와는 20여m 거리를 두고 있고 지석묘는 잡목에 덮여 있어 구별하기가 어렵다. 가장 큰 1호 지석묘의 상석 규모는 280×210×180cm정도로 장축방향은 동-서이며, 상석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다. 2·3·4호 지석묘는 잡목에 가려져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복다회마을 이문수씨 집 내에 1기의 지석묘가 있다. 상석의 규모는 담장 시설이 무너져 상석을 2분의 1 정도 덮고 있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지석은 2개가 확인되지만 주변의 잡석이 산재하고 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이씨에 의하면 원래는 지석이 상석 아래로 돌려져 있었다고 한다. 또한 집 주변에는 지석묘로 보이는 석재들이 산재해 있다.
1980년대 보건소 입구영암읍 남풍리 옛 농촌지도소로 가는 좁다란 길이 추억을 한껏 되살려 준다.'도립공원 월출산'이라는 푯말이 보이지만 지금은 국립공원 월출산으로 승격돼 전국의 등반 애호가들은 물론 관광객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2000년대 보건소 입구옛 농촌지도소 자리에 여성회관과 장애인 복지회관이 들어서고 부근에 노인복지회관과 영암군 보건소가 각각 자리해 국립공원 월출산의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명실공히 이곳은 영암군의 '복지타운'으로 탈바꿈 했다.
영암-독천간 지방도로에서 화소마을 입구를 400여m 지나 우측의 야산에 7기의 지석묘가 있다. 또한 이곳은 화소마을의 서북쪽 구릉에 해당되며 지방도로 확장구간에서 20여m 우측으로 떨어진 곳이다. 이 지석묘군은 북동-남서방향으로 열을 이루고 있는데, 1기는 반파되고 1기는 매몰되어 있다. 나머지 3기는 상석 규모가 대형이며 지석이 노출되어 있고 하부는 도굴된 흔적이 있다.
몽해마을의 서쪽 야산 정상부 밭에 1기의 상석이 있다. 이곳은 몽해마을의 정자에서 서쪽으로 바라다 보이는 곳인데, 상석이 세워져 있어 입석처럼 보이지만 지석묘 상석을 이용한 것 같다. 규모는 상석이 세워져 묻혀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마을주민들에 의하면 젊은이들이 많이 죽어 이곳에 정월보름 제사를 올린다고 하여 상석 주변에 제단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1980년대 영암읍 입구월출산이 훤히 보이는 영암읍 입구 3거리. 해남, 완도, 강진으로 이어지는 이 도로는 영암의 관문에 위치해 지역발전에 많은 기여를 해왔다.확장되기 이전의 좁은 도로와 눈 덮인 월출산의 모습이 새롭다. 2000년대 영암읍 입구영암의 주요 관문인 이곳은 1980년대와는 달리 4차선으로 확 뚫려 시원스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주민들의 대중 교통수단으로 만남의 장소로도 활용했던 버스터미널이 이전되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오산마을 앞 들녘에는 모두 3기의 입석이 분포되어 있다. 먼저 1호 입석은 밭가에 있는 것으로 형태는 삼각형이며 규모는 100×50×22cm이다. 2호 입석은 논둑에 있고 규모는 135×53×50cm이며, 3호 입석은 마을 앞 야산 끝자락에 있는 것으로 규모는 210×145×40cm이다. 오산마을에 이처럼 3기의 입석을 세우게 되었던 유래는 풍수지리설에 의해서다. 오산마을은 지네형국이고 그 앞에 보이는 주암마을은 닭 형국이라 전해오는데 지네가 닭에게 먹히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이같은 입석을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3호 입석은 일명 ‘칼바위’라 불리는 것으로 월출산 밑의 닭바위 목을 칼로 쳤다해서 칼바위라 불린다고 전해온다.
오산 마을회관에서 북동쪽 구릉 정상부에 축사가 있다. 이 축사 옆으로는 대나무 밭이 야산으로 이어지는데, 빽빽이 들어선 대나무밭에 지석묘군이 위치한다. 기존 조사에는 17기가 보고 되었는데 현재는 대나무가 무성하여 밖에 드러나 있는 2기만이 육안으로 확인되고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이곳을 마을에서는 일명 ‘드리시암골’이라고 부른다.
1970년대 농협영암군지부 청사영암읍 동무리 영암군청 소재지 인근 농협중앙회 영암군지부 건물.'협동으로 생산하자'는 선전문구가 눈에 띈다. 청사 앞에는 화단이 놓여 있고, 화단 앞에 세워진 리어카는 당시 시대상황을 웅변해 주고 있다. 2000년대 농협영암군지부 청사외벽을 유리로 말끔히 단정한 건물과 세련미 넘치는 간판이 예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청사 앞에 있던 화단은 주차장으로 변모되었고, 농민들의 중요한 운송수단인 리어카가 있던 자리에는 자동차가 있다.
영암-독천간 지방도로 구림사거리에서 남송정마을 쪽으로 200여m 지나면 학암마을 회관이 있다. 이 마을회관 건너편 최무장씨 집안과 대밭 속에 2기의 지석묘가 위치한다. 집안 장독대 옆에 있는 지석묘의 규모는 310×210×90cm 정도이며 장축방향은 북동-남서이다. 집 뒤의 대밭 속에 있는 지석묘는 정확한 규모를 알 수 없다.
영암-구림간 지방도로변의 호동주유소 우측의 야산에 14기의 지석묘가 있다. 이곳은 호동마을 간이정류장 뒤편 야산인데 천안김씨 집단묘역 조성으로 인하여 상석들이 대부분 이동되었고, 상석 위에는 나무들이 얹어져 있으며 상석이 엎어져 있는 것도 있다. 이 지석묘군은 남-북 2열을 이루고 있으며 가장 큰 지석묘의 규모는 500×360×90cm 정도이며 장축방향은 남-북이다. 상석의 형태는 부정형으로 지석 1개가 있다.
1970년대 금정면 안로리본래 백제 때 이로곡현(안로현)의 소재지로서, 아실 또는 안로, 안로촌으로 불렸다.고려때는 나주목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영암군으로 편입됐다. 마을 앞에서 뛰어노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정겹다. 2000년대 금정면 안로리영암군 11개 읍. 면 중에서 산림면적이 가장 많은 지역으로 오지에 속한 금정면은 지금도 예전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다.안로리는 1980년대 후반 무렵 인구가 300호가 넘을 정도로 많았으나, 다른 동네와 마찬가지로 크게 줄었다.
영암-구림간 지방도로에서 호동주유소 50여m 못미처 호동마을로 들어가는 소로가 있는데 이 소로를 따라 20여m 가면 좌측으로 20여m 떨어진 박기포씨 소유의 논에 6기의 지석묘가 있다. 또한 이곳은 지방도로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석묘군은 동-서 2열을 이루고 있으며, 2기의 지석묘에서는 2개의 지석이 확인되지만 나머지는 상석이 논에 매몰되어 있다.
호동마을 전동일씨 집 뒤뜰에 2기의 지석묘가 있다. 1호 지석묘는 하부가 잡석으로 메워져 있고, 상석의 중앙부에는 혈구가 있으며 옛날에는 집의 주춧돌로 사용했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범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2호 지석묘는 파괴되어 이동된 듯하며 마을에서는 ‘개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1970년대 신북면 소재지신북면사무소에서 신북초등학교로 이어지는 옛 갈이 시골의 정취와 함께 옛 추억을 되살리게 한다. 2000년대 신북면 소재지먼지가 나는 자갈길은 포장도로로 바뀌고, 예전에 없던 건물들은 도로가에 나란히 들어서 있다.
주암마을 박양회씨 집 마당과 담벽 뒤편에 5기의 지석묘가 있다. 가장 큰 지석묘는 배 모양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마을에서는 일명 ‘배바위’라고 부른다. 상석의 규모는 570×430×200cm 정도이다. 장축 방향은 남-동으로 형태는 타원형이다. 또한 ‘배바위’ 주변의 지석묘는 ‘뗏목’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지석묘군은 ‘배바위’를 시작으로 박양회씨 집 뒤편의 밭까지 분포하고 있다.
영암-구림간 지방도로와 접해 있는 주암마을 입구에서 30여m 지나면 좌측으로 (주)정동비료로 가는 농로가 있다. 이 농로는 주암마을에서 호동마을로 넘어가는 길인데, 이 길로 250여 m를 따라가면 우측의 야산에 18기의 지석묘가 있다. 이곳의 상석들은 민묘 조성으로 인해 대부분 파괴되어 이동되었다. 이동된 상석은 민묘 주변에 반원을 그리며 감싸고 있는 현재는 3기 정도만이 제 위치에 있다.
1970년대 학산면 독천독천은 예로부터 미암, 삼호, 서호 등 3개의 면의 접경지이고 강진, 해남, 목포를 연결하는 국도가 지나가는 교통의 중심지였다.이같은 여건으로 영암에서는 가장 빨리 시장이 섰고 '독천장은 허천장'이라는 속담이 전해 내려올 정도로 값도 싸고 물건이 많아 몰렸다. 2000년대 학산면 독천1993년 11월 학교법인 봉석학원이 독천 뒷산에 동아전문대학이라는 이름으로 개교했다.이후 1998년 동아인재대학으로 교명이 변경되었고, 재학중인 학생들로 인해 독천 시가지는 젊음이 넘쳐나는 곳으로 변모했다. 학교 주변에는 예전에 없던 건물도 많이 들어섰다.
이 입석은 동변마을 당산제의 아랫 당산 신체이다. 이곳은 ‘西湖之神’인 당산할매가 거처하는 곳으로 마을 서북방 방조제변에 있다. 입석은 직사각형의 자연석으로 높이 203cm, 두께 63cm, 너비 62cm이다. 현재 입석 앞에는 1984년 당산 주변을 정화하면서 마련한 가로 122cm, 세로 85cm, 두께 30cm의 직사각형 상석이 놓여 있다.
평리(월악동)마을의 가장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김용주씨 집 뒤편 밭과 월악동에서 평리로 가는 소로의 경계 지점에 1기의 지석묘가 있다. 상석의 규모는 190×150×50cm 정도로 장축방향은 동-서이다. 상석의 형태는 장방형으로 지석 1개가 있다. 모정마을 100여m 못 미쳐 좌측으로 25m지점의 감나무 과수원과 논둑에 위치한다. 경지정리로 인하여 상석이 이동되어 한 곳에 모아졌기 때문에 확실한 기수는 알 수 없지만, 기존에 조사된 4기 이상의 상석이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