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영암읍소재지와 월출산
▥1960년대 월출산 주변 모심기 현장
열무정의 창건연대는 분명치 않다. 열무정이라는 정호(亭號)는 1535년(중종 30년) 조정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라고 전하며, 인조 때 건립되었다는 구전이 전해온다. 1880년(고종17년) 군수 閔敞鎬가 중수하였고 1919년에는 독립투사들의 비밀집회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射亭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건물의 기둥에는 8개의 柱聯이 걸려있고, 사장의 넓이는 1600여평에 이른다. 또 열무정 내부에는 ‘閱武亭重修記’를 비롯하여 29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1710(숙종 36년) 열무정 구성원들은 사장을 유지하기 위해 사포계를 조직하였다. 현재 열무정에는 사포계문서 24책(1737년-1947)이 소장되어 있다. 사포계 문서는 영암지방의 吏校 閑良들이 鄕射를 어떻게 운영하였으며, 신분
술유재는 함평노씨 문중 사우인 관봉사(冠峯祠) 강당으로 사용되고 건물이다. 1925년 창건된 이 건물 내부에는 술유재기(述裕齋記)를 비롯 운차(韻次) 7수 등의 편액이 걸려 있고, 건물 후원에는 마을나무로 지정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소재지 : 서호면 쌍풍리 영풍)
◈1980년대 금정면 못자리 병충해 방제 연시대회
▷1980년대 금정면 보온못자리 설치 연시대회
화수정은 하동정씨 문중재실이다. 1924년에 건립되었으며,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이다. 화수정 내부에는 장흥 高光善이 撰한 과 尹寧求가 쓴 등 12매의 현판이 걸려 있다. 화수정 뒷 뜰에는 하동정씨 영암입향조인 감찰공 정의숙의 제단이 마련되어 있는데, 표석에는 라고 새겨져 있다. 관련 자료로는 하동정씨 대동계안 16책이 소장되어 있다. 1663년에 태어난 하동정시 鄭萬泰가 쓴 大東契序文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어간에 조직된 문중계로 추정된다. 현전하고 있는 대동계 자료는 대부분 1910년경에 작성된 것이다.(소재지 : 영암읍 용흥리 초곡)
하동정씨 鄭弘濟(1725-1810)의 정려각이다. 편액에는 라고 기록되어 있다. 1873년에 효행으로 명정를 받았다. 정려각 내부에는 참봉 宋炳華가 撰한 遺槁와 관찰사 鄭泰鉉이 쓴 정려기, 1928년 나주 吳駿善이 쓴 , 金福漢이 지은 등이 걸려있다.(소재지 : 영암읍 용흥리 초곡)
지난달 30일 영암읍 5일 시장이 열린 가운데 각종 차량과 물건 진열 등으로 진입로가 막혀 있어 대형 화재 발생시 소방차의 접근이 어려워 큰 피해가 우려되고 있다.
여산송씨 영암입향조는 宋文亨이다. 송문형은 여산송씨 송유익의 16세손이며, 조선 태종때 忠翊戴佐命功臣 4등에 등재되었던 宋居信의 7세손이다. 본래 경기도 파주에서 세거하다가, 전북옥구로 이거하였으며, 다시 송문형이 영암으로 이사하였다. 최초의 정착지는 영암읍 학송리였다. 탑동마을에 들어오게 된 것은 17세기 송문형의 손자 宋天洋이 이거해 오면서 비롯되었다. 현재 영모재는 여산송씨 제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11월 셋째주에 시제를 모신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소재지 : 영암읍 용흥리 탑동)
보본당은 羅州羅氏 羅斗生을 배향하는 제각이다. 나두생의 자는 子賢, 호는 霽月堂이며 참판에 추중되었다. 영조년간에 이곳 금농촌에 은거하였다. 1938년에 후손들이 묘소 아래에 公을 추모하고 報本하려는 뜻에서 대청 2칸 규모의 검소한 제실을 마련하였다. 1957년에 2차 중수를 하였으며,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소재지 : 덕진면 용산리 금농촌)
◎1970년대 영암읍 5일시장
♣1970년대 삼호면 한해 대책 현장
덕진면 금강리 금산마을에서 한 노부부가 다른 일손을 구하지 못해 힘겨운 무 수확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최근 무·배추 등 김장채소값이 폭락한 가운데 출하를 포기한 농가가 속출하고 있으나 이 농가는 계약재배가 이뤄져 판로에는 한 시름 놓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한다.
◆1970년대 초등학교 소풍 광경
◆1970년대 금정초등학교 안로 한우경진대회
영팔정은 조선초 전남도 관찰사로 부임한 夏亭柳寬(하정유관 1346∼1433)이 현 모산리의 지세와 경관이 좋아 世居地(세거지)로 택하고 그의 아들 孟聞(맹문)에게 명하여 1406년(태종6)에 건립한 정자이다. 유관은 조선 개국공신으로 태조실록과 고려사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청백리에 등재된 인물이다. 초창 당시의 亭號는 나주목사 유두명이 마을 이름인 茅山(모산)의 '茅'자와 유관의 호인 夏亭의 이름을 따서 茅亭이라 칭했다고 한다. 그 후 율곡 이이(1536∼1584)가 이곳에 와서 유관의 학덕을 기리면서 주변 경관을 八景詩(팔경시)로 읊었으며 그 뒤에 고경명, 남이공, 유상운 등이 팔경시를 연작하던 곳이라 하여 詠八亭으로 바뀐 듯 하다. 그 후 후손인 柳尙運(1636-1707)이 1692년(숙종 18)에 기
삼충각은 갈곡리 3구 종오리마을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명랑해전에서 순절한 朴亨俊(박형준 1548-1592)과 그의 아들 孝男(효남 1568-1592), 好男(호남)등 3부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846년(헌종 12) 道儒(도유)가 발의하여 상소하자 1860(철종 11)년에 3부자의 命旌(명정)이 내렸다. 1901년과 1932년에 개수한 뒤 1946년에 중창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82년에 중수된 것이다. 奮武齋(분무재) 박형준은 趙憲(조헌)의 문하에 있었으며 예안현감으로 재임시 餉穀(향곡)을 거두지 못하였다 하여 영암에 유배되었고, 다음해에 풀렸으나 이곳에서 은거하였다. 왜적의 침입이 빈발하자 효남·호남의 두 아들과 함께 이충무공의 휘하에 들어가 명량전에서 분전하던 중 순절하였다. 3부자
KT&G영암지점이 최근 영암읍 공설운동장 앞에서 관내 담배잎 재배농가들을 상대로 수매를 실시한 가운데 포장된 담배잎이 자동으로 운반차량에 운송되는 등 모든 농촌현장이 기계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영암군교회협의회(회장 박대식) 선교분과위원회(위원장 윤병상)와 영암군이 함께 설치한 송년 및 새해맞이 경축 트리가 지난 28일 영암읍 로터리와 삼호읍 영산호관광지에 동시에 점등됐다. 이번에 점등한 경축 트리는 경인년을 잘 마무리하고 희망과 활기찬 새해를 맞이하고자 하는 지역주민의 염원을 담아 12월 말까지 영암 전역을 환하게 밝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