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호남 의병의 전설 국사봉, 역사적 조명되지 않아남도 의병사령부, 국사봉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해산으로 의병들의 항쟁은 독립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의병들은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진지를 구축하며 일본군과 수많은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른바 장기전으로 돌입한 것이다. 전남지역에서는 고광순·김동신(지리산), 김준(어등산), 전해산(석문산), 기삼연(수록산), 양진여(양진여), 안규홍(동소산), 박평남·심남일(영암 국사봉) 등이 험준한 산악을 배경으로 일제와 처절한 독립전쟁을 치렀다.영암 금정면 소재 국사봉은 험준한 지세와 사방
‘순천’, 그러면 순천만 갈대가 떠 오른다. 순천은 순천만 습지를 활용한 축제를 관광도시 순천으로 발전시키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곧 ‘갈대’, ‘흑두루미’ 이러한 것을 상징으로 한 브랜드를 만들어냈다. ‘영암’, 그러면 찬란한 ‘마한 르네상스’가 꽃피운 곳, ‘대형고분군’, ‘옹관’, ‘옥’ ‘월출산’, ‘왕인’ 이러한 단어들이 연상되어야 한다. 마한축제를 지역의 브랜드로 만드는 전략을 수립하여야 한다. 논의한 바를 토대로 마한축제 발전과 관련하여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축제 캐릭터와 심벌의 중요성 마한축제 캐릭터와 심벌을 개
박도집 의병부대는 앞서 언급한 바처럼 영암 출신들이 대부분 의병을 구성할 정도로 대표적인 ‘영암 의병’이었다. 1909년 6월 박사화 의병부대와 함께 영암 종남면 신안동 동장을 처단하였고, 1909년 6월 29에는 나주 남창장 파견소를 공격하여 헌병 1명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시종 출신인 강달주는 심남일 의병부대의 호군장으로, 1908년 오치동 전투, 6월 25일 능주 전투, 10월 9일 해남 전투, 1909년 5월 12일 보성 천동 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서 의병부대를 인솔하여 빛나는 전공을 세
엊그제 3·1운동 102주년을 맞았다. 필자에게 102주년 3·1운동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모 일간지에 ‘박해현의 새로 쓰는 광주·전남 3·1운동사’를 매주 시리즈로 연재하면서 우리 지역 3·1 운동사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음을 보고 깊은 충격을 받았었다. 특히 당시 우리 애국지사들의 피의 기록인 판결문 정리가 미비하고, 그에 입각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우리 지역 3·1 운동사가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이러한 광주·전남 3·1 운동사 연구의 한계를 극복
심남일 의병부대는 전해산 의병부대, 안규홍 의병부대와 더불어 1908~1909년 사이에 일제가 ‘거괴’(巨魁)라고 평가할 정도로 호남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의병부대였다. 심남일 의병부대는 일본 정규군과 전투를 하면서 지형지물을 이용한 매복 요격이나 야간 기습 공격 같은 유격 전술을 적절하게 구사하였다. “심남일은 용마를 타고 산 밖으로 뛰어나갔고, 강현수는 풍운 조화를 부려 공중으로 날아갔다.”라는 동요가 나온 것은 이 때문이다.한편, 심남일은 각 의병부대의 독자적인 활동보다 연합작전을 중시하였다. 이를테면 “5월 12일 천동에 주
지역 상품의 브랜드화2월 19일자 본보 1면 머리글은 “영암관내 초·중학교 수년 내 폐교 ‘수두룩’”이었다. 학교별 학생 수까지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곧 마한왕국의 심장 ‘영암’이 역사에서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눈앞에 닥친 이 안타까운 현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지방인구의 감소 요인이 농촌인구의 도시이탈 때문이라는 것은 과거의 이야기이다. 젊은이들이 아예 없다시피 한 현실에서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다. 지역 인구 감소를 억제하고 점차 늘리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정책도 중요하지만
비대면 온라인 콘텐츠 확대포스트 코로나 시대 언택트 문화 일상화, 온라인 중심의 소비문화 확산, 디지털 가속화에 따라 소비·여가의 방식이 변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고 문화·관광산업 또한 온라인 랜선공연, 프로스포츠 무관중 경기 등 새로운 문화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영암군은 이런 시대적 변화에 따라 축제를 통한 코로나 극복 메시지를 전 국민과 세계인에게 전달하여 왕인의 후예로서 자긍심을 고취한다는 방침이다. 특히 온라인 영암왕인문화축제 차별화 전략으로 개막식, 축하쇼 등 관객 밀집 실내행사와 집합 행사는 철
‘남해신사’에 관한 오류남해신사 터를 발굴한 목포대 박물관 조사보고서에 “남해신사에 관한 최초의 문헌적 기록으로는 증보문헌비고에 ‘고려 현종 19년(1028년) 비로소 사전에 올렸다’고 서술하였고, 이어 고려 시대 처음으로 국제로 등록되었으며, 고려·조선 시대에 해신제를 모셨던 3대 신사의 하나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곧 남해신사를 고려·조선 시대에 동해의 양양의 동해묘, 서해의 풍천의 서해단과 함께 3대 해신당의 하나로 이해하였다. 남해신사에 대한 문헌기록은 ‘고려사’ 현종 16년 ‘陞南海神祀典’이라 하여 고려사에 기록이 있다.
구림 상대포와 시종 남해포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영산 지중해’라는 표현을 쓴다. 이는 지중해가 고대 유럽문화의 중심지를 형성한 ‘로마의 호수’처럼 거대한 호수를 형성한 영산호가 대륙문화와 해양문화가 교류하며 고대 마한문화를 꽃피운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영암지역이 마한의 심장부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영산 지중해 입구에 있었다는 지정학적인 위치가 중요한 요인이었다. 구림의 상대포, 시종의 남해포와 같은 항구들은 일찍이 마한 시대부터 국제 무역항으로써 기능을 하며 외래문화들이 융합되어 새로운 문화로 탄생하는 중요한 거점 구실을
필자는 고고학자가 아닌 역사학자이다. 고고학(考古學, Archaeology)은 백과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과거 인류들이 남긴 물질적 자료를 통해 당시의 문화, 즉 행위, 사회적 조직, 이념 등을 복원하고 그들의 문화가 어떻게 그리고 왜 변화했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그리고 역사학(歷史學, History)은 선사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인간 활동을 조사, 연구를 수행함으로써 과거의 사료를 평가, 검증하는 과정을 통해 역사적 진실 규명을 추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고고학이 물질적 자료를 바탕으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삼한 사회첫 검인정 체제가 적용된 2009 교육과정 교과서 서술에서 다양한 학설이 소개되기를 기대하였으나 이전 국정 교과서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선 고등학교에서 당시 가장 많이 선택한 출판사의 마한 서술 내용을 그대로 옮겼다.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는 진이 성장하고 있었다. 중국과의 교역 과정에서 진은 고조선의 방해를 받았다. 이후 진에는 고조선 사회의 변동에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는 유민들에 의하여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었고, 토착 문화와 융합되면서 사회가 더욱 발전
15년이 넘도록 지지부진하던 ‘영암·해남 기업도시’(솔라시도) 사업이 영암호 횡단교 건설공사와 함께 진입도로 개설공사가 한창 진행되면서 가속도가 붙고 있다.더욱이 전라남도는 코로나19 시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뉴노멀의 정립 필요성과 함께 사람과 자연·환경이 조화된 도시를 위해 서남해안을 대안으로 하는 적극적인 개발에 나선다는 방침이어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솔라시도’ 어디까지 왔나전남도는 당초 사업비 32조원의 J프로젝트 계획을 세우고 2005년 ‘영암·해남 관광·레저형 기업도시’에 선정됐으나 민자유치에 번번이 실패하자 201
마한사의 오류 수십년 간 답습지난 호에 인용한 국정 교과서 체제인 1999년 제정 교과서는 다음과 같은 서술의 특징이 있다. 먼저 삼한의 형성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한반도 남부에 성립된 진국에 고조선의 유이민 세력의 이동으로 진국이 해체되면서 마한·변한·진한이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유이민 이동과정에서 삼한의 성립을 설명한 기존의 이해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가 과연 타당한 것인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미 살핀 바 있지만 한반도 중남부에는 기원전 2세기 이전에 한(韓)이 성립되어 있었다. 그것은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
남평 거성동 접전기유(己酉 1909) 3월 8일. 대장 서리 강현수는 박봉주·박채홍과 함께 나주 월교리에서 유진하였다. 이날 밤에 세 의병부대를 남평 운삼동에서 집합하여 선동으로 옮기는데 정탐군이 와서 “왜적 15명이 몰래 운곡(雲谷)으로 들어갔다.”고 보고하므로 다시 군사를 정돈하여 본진은 장암에 머물고, 박봉주·박채홍은 철천에 진을 치고, 박민홍은 선동에 주둔하니 네 진이 서로 4~5마정 사이에 있었다. 정탐군이 와서 적이 출발해서 선동으로 들어갔다 하므로, 이내 군중에 영을 내리어 돌담 밑에 복병하게 하고 적을 유도하여 싸움을
옥야리 방대형 고분은 융합문화의 산물지난 호에 영암지역 마한 대형고분을 주제로 왕인박사현창협회 주관 학술세미나가 있었음을 언급한 바 있다. 이날 토괴(土塊: 흙덩이)를 활용한 시종 옥야리 방대형 고분의 축조 기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가야 및 신라, 일본과 교류가 백제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 세력 중심지의 이동 혹은 재편 과정에서 5세기 중엽 무렵에 영암 시종 일대 세력이 대외 교류를 통하여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는 주장이 있었다. 시종 옥야리 방대형 고분의 토괴를 이용한 축조 기술은 왜의 동심원 양식과 가야의
전남도에 ‘마한팀’ 직제 필요지난 11월 27일 광주에서 왕인연구소가 주관하는 ‘영암 마한 고분의 조사성과와 활용방안’이라는 주제로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코로나19가 재차 창궐하는 엄중한 상황에서도 왕인박사의 활동을 찾아 영암과 한국사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왕인현창협회 회원과 영암인의 열기는 세미나장을 달구었다. 특히 세미나를 주관하기 위해 서울에서 일부러 내려온 전석홍 왕인현창협회 회장님의 열정이 왕인 연구를 실증적으로 이끌고 있다고 본다. 가끔 필자에게 격려 전화를 해주시는 전석홍 회장님과 행사 시작 전에 마한사 연구와 관련된 얘
전남의 대표적 구석기 문화유적지보성강은 길이가 126.75㎞에 이른다. 보성군 웅치면 대산리 제암산 남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흐르다가 장흥군에서 장평천, 보성읍 북쪽에서 노동천과 합류하고 미력면과 겸백면에서 보성강 댐을 이룬다. 보성강 댐은 일제가 1930년 후반 일제가 득량만에 대규모 간척지를 조성하면서 필요한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 필자의 고향 뒷산 대룡산을 관통하는 터널을 뚫어 득량만으로 흐르게 하였다. 조성면과 득량면, 고흥군 대서면의 대규모 간척평야에 필요한 농업용수는 이곳의 물을 이용한다. 이
남평 거성동 접전기유(己酉 1909) 3월 8일. 대장 서리 강현수는 박봉주·박채홍과 함께 나주 월교리에서 유진하였다. 이날 밤에 세 의병부대를 남평 운삼동에서 집합하여 선동으로 옮기는데 정탐군이 와서 “왜적 15명이 몰래 운곡(雲谷)으로 들어갔다.”고 보고하므로 다시 군사를 정돈하여 본진은 장암에 머물고, 박봉주·박채홍은 철천에 진을 치고, 박민홍은 선동에 주둔하니 네 진이 서로 4, 5마정 사이에 있었다. 정탐군이 와서 적이 출발해서 선동으로 들어갔다 하므로, 이내 군중에 영을 내리어 돌담 밑에 복병하게 하고 적을 유도하여 싸움
강진 오치동(吾治洞) 접전무신(戊申 1908) 3월 7일 남평으로부터 행군하여 강진 오치동에 당도했는데, 깃발이 공중을 가리고 칼과·창이 서릿발 같으니 보는 자마다 혀를 내두르고 눈을 휘둥거리며, “지금 세상의 강태공·제갈공명이다. 우리 한국 5백년 종묘사직이 이로부터 중흥될 가망이 있다.”고 모두 말하였다. 드디어 군문을 굳게 잠그고 군사들과 더불어 큰 잔치를 하는데 뜻밖에 왜병 수백 명이 충돌하여 싸움을 걸어오므로 군사를 출동시켜 서로 접전하여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에 적 수십 명을 목 베고 무기를 모조리 빼앗았다.장흥·
전남의 뿌리, 마한사 바로 세워야지난 11월 13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영산강 유역 마한문화권 마스터 플랜 수립을 위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국제학술대회 행사 이전에 ‘잠들었던 고대 해상왕국 마한을 깨우다’라는 주제의 비전 선포식이 열렸다. 비전 선포식에는 김영록 전라남도지사, 정재숙 문화재청장, 전동평 영암군수를 비롯 마한문화권발전협의회 11개 시장·군수, 유인학 마한역사문화연구회장 등 여러 내빈들이 함께 했다. 서울 마당 대형전광판으로 생중계된 비전 선포식에선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기증한 대형옹관 재현품을 활용해 잠들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