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이 낳은 최고의 예술인가야금 명인 악성 김창조 선생은 영암이 낳은 최고의 음악가이자 예술인이다. 그의 발자취는 회문리와 월출산 작은골 주변 곳곳에 남아 있다. 기찬랜드 안에 선생의 생가터, 가야금 동산, 그가 월출산 천황봉을 바라보며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신선바위, 용추폭포와 깨금바위 등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가야금산조테마공원도 조성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가야금 산조와 관련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이에 앞서 회문리에 살고 있는 조동현 선생의 글을 통하여 악성 김창조의 성장 과정을 조명해 보았다. 이번에는 회문리에
전북의 뒤늦은 공동 대응전라북도는 최근 마한 역사문화권의 체계적 정비와 발전을 위해 14개 시·군, 박물관 등과 공동 협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협약에는 도내 모든 지자체를 비롯해 국립익산박물관,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전북연구원 등 5개 유관 기관이 참여했는데, 이들 기관은 마한 유적의 체계적 발굴조사, 국가예산 확보 등에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고 한다.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마한사 규명과 정체성 확립 및 위상 정립을 위해 발굴조사, 학술연구, 홍보활동, 마한 역사문화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자체사업 발굴
회의촌 고인돌(나군)영암읍 회문리 207번지 일원에 있었던 고인돌은 영암축협 종합청사 신축공사 부지에 포함되어 (재)동북아지석묘연구소에서 2014년 11월 24~12월 30일에 걸쳐 발굴 조사를 실시한 후 이곳으로 이전·복원하였다. 발굴된 유적은 덮개돌 2기와 무덤방(석실) 25기 등 총 17기가 발견되었으며, 유물은 자루 달린 간돌검(유병식 석검), 슴베식 돌화살촉(유경식 석촉), 민무늬토기편 등이 발견되었다. 복원된 고인돌은 모두 받침돌이 있는 바둑판식(기반식) 고인돌이다. 1호의 덮개돌 규모는 길이 245㎝, 너비 198㎝,
한반도 중남부의 역사“마한은 기원전 2세기 이전부터 한반도 남부에 역사를 남겼다. 마한에서 변한·진한이 갈라져 나왔고, 마한 사람이 진한·변한의 왕을 하였다. 마한역사가 한반도 중남부의 역사인 셈이다. 북쪽에 고조선·부여가 있었다면 그 남쪽에는 마한이 있었다. 마한의 역사는 6세기 중국 ‘양직공도’에서 확인되고 있다. 8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마한삭 한국고대사의 원류이자 본류임을 말해주고 있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할 때 마한·백제의 부활을 강조하였다. 마한의 정체성이 9세기 말까지 이어졌음을 알려준다. 마한역사를 규명하는 것
영암읍 회문리 가는 길은 온통 유채꽃 향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날씨는 을씨년스러웠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가랑비가 흩날렸다. 전날은 따뜻한 봄날이었는데 오늘은 외투를 입어야 할 정도로 공기가 싸늘했다. 회의촌 조동현 선생과 인터뷰 약속이 잡혀 있어서 일찍 집을 나섰다. 아흔을 훌쩍 넘긴 선생은 영암의 산 역사나 다름없다. 선생의 집 앞에는 아름드리 고목이 몇 그루 서 있는데 대문 역할을 한다. 평절로 문안 인사를 올리고 회문리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그 가운데에서 우선 가야금 명인 김창조 선생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고창 봉덕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4월 21일 문화재청은 전북 고창 봉덕리 1호분과 나주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백제 시대 '금동신발' 2건을 비롯해 ‘장성 백양사 아미타여래설법도 및 복장유물’ 등 총 3건을 보물로 지정했다고 발표했다. 발표문에 따르면 고창 봉덕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은 1500여 년 전 한국 고대인들의 상장례(喪葬禮) 문화를,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은 5~6세기 백제 금속공예 기술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이라고 하였다. 문화재청은 둘 다 각각 한 쌍으로 출토된 금동신발은 모두 5세기 백제 시기에 제작됐으며, 삼국시
회문리를 비롯한 벚꽃 백리 길에 인접한 마을들의 원래 지형을 이해하려면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던 시대의 옛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향토문화진흥원에서 발행한 1500년 전의 지도를 보면 그 당시 영암의 모습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당시 영암은 완전히 바닷가 마을이었다. 덕진만이 영암읍 코앞까지 깊숙이 파고 들어왔다. 덕진강을 사이에 두고 영암읍에 접한 덕진포는 영산호 하구둑이 생기기 전까지 포구 역할을 담당했다. 옛 지도를 보면 덕진만은 도포를 거슬러 올라오면서 덕진 영보마을, 군서 주암리, 성양리, 구림마을, 서호 장천마
옥야리 고분서 첫 석실묘제 출현1996년 촌로들 사이에 봉분이 일곱이 있다고 하여 ‘칠조산(七造山)’이라 불렀다고 하는 곳에 남아 있는 4개의 고분이 확인되면서 나주 복암리 일대가 크게 주목되었다. 이 가운데 3호분에서 옹관묘 22기, 수혈식 석곽묘 3기, 횡혈식 석실분 11기, 황구식 석곽묘 1기, 횡구식 석실묘 2기, 석곽옹관묘 1기, 목관묘 1기 등이 확인되었다. 목관묘-옹관묘-석곽 옹관묘-수혈식 석곽묘-횡구식 석곽묘-횡혈식 석곽묘 순으로 변천하는 묘제의 구체적인 모습을 밝혀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복암리 3호분 가운데
길 위에서길을 걸으며 길 위에서 또 다른 길을 내려다본다. 길은 어쩐지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를 닮았다. 우뚝한 몸통이 있고 거기에서 갈라지는 큰 가지가 있고 다시 거기에서 갈라지는 작은 가지가 있다. 길도 마찬가지이다. 커다란 신작로가 있고 거기에서 마을과 논밭으로 통하는 작은 길들이 나눠지고 다시 거기에서 골목길과 논두렁길로 나눠진다. 생김새뿐만 아니라 품성도 비슷하다. 당산나무도 길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누구든 찾아와 말을 걸고 기도하는 사람이 나무의 주인이듯, 먼 길이든 험한 길이든 따지지 않고 걷는 사람이 그 길의 주
백제 중심의 마한 역사작년 5월 국회에서 통과된 ‘역사문화권 특별법’에 마한이 포함되어 우리 지역에서 이른바 ‘마한 특별법’이라 불리는 법률이 5월부터 시행된다. 이 법률은 마한을 비롯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 탐라 등 우리 고대사를 체계적으로 연구, 조사, 개발, 보존을 위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동안 한국 고대사에서 고구려 역사는 그 대상 지역이 주로 휴전선 이북에 속하기 때문에 연구에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국 고대사는 휴전선 이남에 속한 신라, 백제, 가야의 역사를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세 번째 마을 순례길을 나서며 필자는 두 번에 걸쳐 마을 순례길을 떠난 적이 있다. 한 번은 2009년부터 2010년까지 2년 동안 영산로 따라 ‘배롱나무 백 리 길'을 걸었고, 또 한 번은 2016년부터 2017년까지 2년 동안 은적산 선사주거로와 서호로를 따라 ‘은적산 마실길’을 다녀왔다. 이 길들은 영암 서쪽 외진 곳에 있어서 대부분의 영암 사람들도 잘 모르는 길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지난 4년 동안 본지에 연재했던 ‘배롱나무 백 리 길’ 영산로와 ‘은적산 마실길’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영산로 따라
‘마한 길’을 열자최근 필자는 연달아 두 권의 저서를 출간하였다. 한 권은 본보에도 소개된 바 있는 ‘판결문으로 본 광주전남 3·1운동’이고, 다른 한 권은 역시 본보에 연재하고 있는 글을 토대로 서술한 ‘박해현의 새로 쓰는 마한사’이다. 두 책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 줄거리가 전개되고 있는 곳이 영암이다. 이러한 점에서 필자는 영암군민에게 늘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1919년 군서면 구림리와 영암읍에서 일어난 영암의 3·1운동은 주동자 및 적극 가담자 전원이 징역형을 받을 정도로 치열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영암의 항일정신은 한말 의
조선 시대 최초의 의병이제까지 ‘영암 의병’의 실체를 찾아보았다. ‘영암 의병’은 ‘호남 의병’을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의병임을 확인하였다. ‘영암 의병’이 지닌 역사적 의의를 몇 가지로 나누어 정리하려 한다.도포 출신 양달사가 조선시대 ‘최초 의병장’ 역사를 썼다. 임진왜란 때 수많은 영암 출신들이 국난극복에 몸을 던졌다. 전몽성·몽진 형제가 대표적이다. 임진왜란 때 영암을 찾은 이순신을 따라나선 영암인들이 많았다. 이순신은 영암인들의 활약에 감동되었다. 구림 연주현씨 집안과 인연을 맺은 이순신은 전쟁 수행과정에서 영암인들
wleh 천혜의 요새 국사봉국사봉이 심남일 의병의 거점이라는 사실은 다른 진중일지를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1909년 1월 2일 영암수비대의 보고에 “적 근거지 즉 분토동산을 포위할 목적으로 1908년 12월 16일 장흥수비대 15명, 영암수비대 47명 등 62명의 토벌대가 영암, 장흥, 능주, 영산포를 연결하는 선을 형성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도 국사봉의 ‘분토동’이 의병본부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09년도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그곳을 근거로 이용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국사봉이
지역의 정체성 갖도록 해야지난 3월 13일(토) 필자가 잘 쓰는 표현인 이른바 ‘마한 실크로드’를 답사하였다. 지도를 보며 작성한 답사길을 직접 걸어보며 마한왕국의 옛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2021년 영암군에서 추진할 ‘마한 답사길’ 프로그램의 예비 답사를 통해 나타난 문제점을 찾아보려는 의미도 있었다. 답사길은 마한의 중심지인 시종의 마한역사문화공원 – 옥야리 고분군 – 장동의 방대형 고분 – 내동리 쌍고분 – 매화촌 방죽옆 고분 – 태간리 자라봉 고분군 – 신연리 고분군으로 시종면 일대의 주요 고분(군)이다.
구한말 호남 의병의 전설 국사봉, 역사적 조명되지 않아남도 의병사령부, 국사봉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해산으로 의병들의 항쟁은 독립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의병들은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진지를 구축하며 일본군과 수많은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른바 장기전으로 돌입한 것이다. 전남지역에서는 고광순·김동신(지리산), 김준(어등산), 전해산(석문산), 기삼연(수록산), 양진여(양진여), 안규홍(동소산), 박평남·심남일(영암 국사봉) 등이 험준한 산악을 배경으로 일제와 처절한 독립전쟁을 치렀다.영암 금정면 소재 국사봉은 험준한 지세와 사방
‘순천’, 그러면 순천만 갈대가 떠 오른다. 순천은 순천만 습지를 활용한 축제를 관광도시 순천으로 발전시키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곧 ‘갈대’, ‘흑두루미’ 이러한 것을 상징으로 한 브랜드를 만들어냈다. ‘영암’, 그러면 찬란한 ‘마한 르네상스’가 꽃피운 곳, ‘대형고분군’, ‘옹관’, ‘옥’ ‘월출산’, ‘왕인’ 이러한 단어들이 연상되어야 한다. 마한축제를 지역의 브랜드로 만드는 전략을 수립하여야 한다. 논의한 바를 토대로 마한축제 발전과 관련하여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축제 캐릭터와 심벌의 중요성 마한축제 캐릭터와 심벌을 개
박도집 의병부대는 앞서 언급한 바처럼 영암 출신들이 대부분 의병을 구성할 정도로 대표적인 ‘영암 의병’이었다. 1909년 6월 박사화 의병부대와 함께 영암 종남면 신안동 동장을 처단하였고, 1909년 6월 29에는 나주 남창장 파견소를 공격하여 헌병 1명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시종 출신인 강달주는 심남일 의병부대의 호군장으로, 1908년 오치동 전투, 6월 25일 능주 전투, 10월 9일 해남 전투, 1909년 5월 12일 보성 천동 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서 의병부대를 인솔하여 빛나는 전공을 세
엊그제 3·1운동 102주년을 맞았다. 필자에게 102주년 3·1운동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모 일간지에 ‘박해현의 새로 쓰는 광주·전남 3·1운동사’를 매주 시리즈로 연재하면서 우리 지역 3·1 운동사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음을 보고 깊은 충격을 받았었다. 특히 당시 우리 애국지사들의 피의 기록인 판결문 정리가 미비하고, 그에 입각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우리 지역 3·1 운동사가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이러한 광주·전남 3·1 운동사 연구의 한계를 극복
심남일 의병부대는 전해산 의병부대, 안규홍 의병부대와 더불어 1908~1909년 사이에 일제가 ‘거괴’(巨魁)라고 평가할 정도로 호남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의병부대였다. 심남일 의병부대는 일본 정규군과 전투를 하면서 지형지물을 이용한 매복 요격이나 야간 기습 공격 같은 유격 전술을 적절하게 구사하였다. “심남일은 용마를 타고 산 밖으로 뛰어나갔고, 강현수는 풍운 조화를 부려 공중으로 날아갔다.”라는 동요가 나온 것은 이 때문이다.한편, 심남일은 각 의병부대의 독자적인 활동보다 연합작전을 중시하였다. 이를테면 “5월 12일 천동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