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의 뿌리 찾기 6년2017년 7월 본지에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라는 제하에 글을 연재한 지 햇수로 벌써 6년, 200호가 되었다. 마한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살펴야 한다는 관점과 교류·융합을 통해 새로운 마한 르네상스를 형성한 영산 지중해의 중심지가 영암임을 실증하려 하였다. 본지에 연재된 글은 2021년 ‘박해현의 새로 쓰는 마한사’라는 제목으로 이미 출간되어 여러분의 사랑을 받았다. 이제 ‘영암의 마한사’를 다룬 단행본을 마무리하면 마한사에 대한 1차 작업은 마무리되리라 믿는다.신문에 장장 6년째 글이 연
함양 숲마루재에서 온 새해맞이 편지매년 새해 아침이 밝아오면 천리길 떨어진 먼 곳에서 반가운 편지 한 통이 온다. 일찍이 25년 전부터 농업과 생태의 가치를 소중히 여겨 전국귀농운동본부를 창설하여 귀농·귀촌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해 왔던 여류 이병철 선생이 경남 함안에 귀촌하신 후부터 해마다 새해를 맞이하는 자세와 태도를 밝히는 편지를 보내오신다. 매년 새해맞이 화두로 한 마디 문자를 선정하여 그 의미를 시로 밝힌다. 검은 호랑이의 해인 임인년 새해에는 ‘깨어날 성(醒)’자를 선정하여 반성과 성찰을 독려하는 편지를 보내오셨다. 선생의
2022년 무인년이 밝았다. 이른바 ‘마한 특별법’이 시행된 지 햇수로 2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제대로 된 원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영암은 물론이지만, 나주는 말할 것 없고 함평도 마한 예산이 대폭 늘어나 바야흐로 지자체별로 마한을 연구하는 붐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영암은 현재 우리나라 남해를 지키는 제3함대 사령부가 있어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마한 이래 이 지역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지난 호에 남해신사가 마한 시대부터 있었을 가능성을 거듭 확인하였다. 오늘은 지정학
장사리 마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당산나무인 감나무를 지나 경사가 제법 있는 언덕 위로 올라갔다.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좁은 농로를 따라 서쪽으로 향하니 구릉의 끝머리에 다다랐다. 마침 밭에 나와 있는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셔서 주민들이 이 지점을 어떻게 부르느냐고 여쭤보았다.마을주민들은 이곳을 ‘사머리’라고 부른다고 한다. 뱀처럼 길게 늘어진 형국의 장사리 반도(半島)의 끝 지점이다. 사머리에 잠시 멈춰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동쪽으로 월출산이 우뚝 솟았고, 서쪽으로 은적산이 병풍처럼 길게 늘어섰다. 성양리·동호리를 지나
지역에서 일고 있는 마한 붐마한을 사랑하는 많은 영암군민의 도움으로 영암지역의 마한유산을 세계유산에 등재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세미나가 두 차례에 걸쳐 끝났다. 세계유산 등재는 우리에게 ‘꿈 같은 소리’라고 비아냥거릴 수 있다. 하지만 꿈을 갖게 되면 꿈은 이루어진다. 물론 꿈을 이루기 위한 절박함이 수반되어야 한다. ‘절박’이라는 단어는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이다. 가령, 내년 대선에 어느 후보가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는지를 필자는 본다. 나주 한전공대 유치가 더 중요할까, 장성 국립심혈관센터 건립이 더 중요할까. 국립심혈관센터
도리촌에서 나와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마을 입구에 장사리 마을이라고 표시된 입석이 보인다. 입석 하단에 마을 유래에 관한 글이 아래와 같이 새겨져 있다.장사리(長沙里)마을 유래“도장리 반도의 끝부분에 뱀 형국이어서 원래는 길 장(長)자와 뱀 사(蛇)자를 쓴 장사(長蛇)라는 지명이었으나 중간에 끝자가 모래 사(沙)로 바뀐 것 같으며, 마을 반도의 맨 끝이 가락 끝이라 하여 포구(浦口)였는데 그곳에 1500년대에 정씨가 들어와 살았다 하고, 그 후 밀양박씨와 고흥고씨가 도리촌에서 들어와 마을이 형성된 것 같다. 마을 앞에 400년 된
신덕정 5거리에서 서쪽으로 직진했다가 곧이어 왼쪽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가면 오붓하게 자리잡고 있는 도리촌 마을이 나온다. 사방이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아늑한 느낌을 준다. 도리촌(道里村)은 군서면 도장리(道長里) 1구이다. 원래 영암군 서시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리촌, 장사리, 가내말을 병합하여 도리촌의 도(道)자와 장사리의 장(長)자를 따서 도장리라 했고 군서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도장리를 1구로, 장사리를 2구로 운영하고 있으며, 북동쪽은 해창리와 접하고 동남쪽은 마산리와 접경하고 있다. 반도 지
필자가 본보 연재 글을 쓰고 있을 때 전남의 마한 유산을 총괄하고 있는 전라남도 전남문화재연구소에서 ‘뿌리 깊은 마한’(2021) 책자를 보내왔다. 전남문화재연구소(소장 이범기)는 영암 시종 내동리 쌍무덤 발굴 조사기관으로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이 책은 전남문화재연구소에서 2021년 마한역사문화 교육총서 시리즈로 펴낸 것으로, 2021년 1년 동안 6회에 걸쳐 실시되었던 ‘마한역사문화교육 전문가 초청강연’을 통해 도민들에게 영산강 유역의 독특한 마한문화를 소개하고 발굴현장에서 일어난 다양한 이야기들과 지역 문화유산의 활용 방향에
마을의 수호신, 소나무영암지역 대부분의 마을 당산나무가 느티나무나 팽나무임에 반하여 신덕정마을은 ‘곰솔나무’가 당산나무 역할을 하고 있다. 곰솔은 흑송(黑松)의 순 우리말이다. 해풍에 강하여 주로 해안가에 방풍림으로 심었다. 표피가 두껍고 검은색을 띤다. 적송이 여성스러운 반면에 곰솔은 남성적이다. 가지의 뻗침과 삐침이 힘차고 거리낌이 없다.신덕정 소나무는 당당한 풍채와 기묘한 생김새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거대한 소나무 분재 같기도 하고 장삼자락 휘날리며 멋 떨어지게 한량무를 추는 선비 같기도 하다. 영암 고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
지난 12월 10일 오후 영암군, 전라남도관광재단 전남문화재연구소, 마한역사문화연구회가 공동 주최하고 마한역사문화연구회가 주관한 ‘2021 마한문화권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국제학술세미나’가 월출산기찬랜트 트로트센터 대공연장에서 열렸다. 당초에는 오전과 오후에 걸쳐 종일 열릴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가 확산되고, 변종 코로나까지 등장하는 어려운 상황을 감안하여 12월 10일, 12월 29일 오후 양일에 걸쳐 하기로 변경하였다. 이번 세미나는 ‘영암지역 마한 유산과 세계유산 등재’라는 주제를 가지고 열린 학술세미나였다. 12월 10일 세
소쿠리 명당에 자리 잡아오산로를 따라가다가 독립유공자 김재홍 선생의 공적비를 지나면 오거리가 나온다. 주민들은 이곳을 잿등이라고 부른다. 왼쪽으로 가면 낙안마을이 나오고 곧바로 가면 도리촌과 장사리가 나온다. 오른쪽 길은 목화정 마을로 통하는데, 지대가 제법 높아서 주변 풍광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다. 이 구릉 한 가운데 신덕정의 명물인 500년이 넘는 수령의 소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추앙받고 있다.신덕정은 해창리에 속한다. 본래 영암군 서시면 지역으로 바닷가에 창고가 있어 창말, 창촌, 해창(海
역사는 인문학적 상상력 길러줘필자는 강의할 때나 대중 강연할 때 역사가 중요한 이유를 두 가지 꼭 이야기하고 본론에 들어간다. 하나는 과거의 사실에서 교훈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대표적 편년체 역사서로 유명한 중국의 사마광이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이 당시 황제가 “지난 일을 거울삼아 치도(治道)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라는 의미에서 책 이름이 나온 것은 유명한 예이다. 어느 도로 구간에서 사고가 자주 난다고 하자. 그것은 우리가 그곳이 사고 다발 구간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고,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왜 그곳에서 자주 일어나지를 알
신덕정 가는 길원마산을 지나 해창리 1구인 신덕정마을까지 가는 길은 가삼봉에서 길게 뻗은 산줄기가 굽이굽이 이어지는 전형적인 신작로길이다. 보기에는 평범해 보여도 곳곳에 전설과 설화가 숨어 있다. 신덕정 못미처 길가에는 독립유공자 김재홍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오산로를 걷을 때 놓쳐서는 안 되는 흥미롭고 소중한 이야기들이다. 가삼봉의 소나무 전설원마산 마을 주민 오병길씨는 가삼봉 소나무에 대한 전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우리마을 앞 산을 주위 사람들은 가삼봉이라고 하는데 생긴 형태가 어른들이 시제나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답사(踏査)라는 사전적 의미는 현장에 가서 보고 듣고 조사함을 말한다. 고사성어에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있다. 100번 들은 것이라 하더라도 한 번 본인이 직접 보는 것만 못하다는 뜻이다. 글이든, 강의든 그것은 본인의 관점이 아니라 글쓴이나 말하는 이의 관점에서 이해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현지 조사를 하거나, 여행을 갈 때 미리 조사를 잘 하지 않는 편이다. 그것은 사전에 공부한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 있었던 두 차례의 각기 다른 답사
영암고을의 가을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월출산 벚꽃 백 리 길 벚나무 가로수들도 모두 잎을 떨구고 나신을 드러내고 있고 들녘엔 촌로들의 흰 머리카락을 닮은 허연 억새꽃들만 쉴새 없이 앞뒤로 흔들거리고 있다. 오산마을에서 원마산으로 넘어가는 언덕 부치재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느 쪽으로 갈까? 벚꽃 백 리 길에 인접한 마을을 계속 답사하기 위해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갈까, 아니면 예정엔 없지만 여기까지 온 김에 신덕정마을까지 더 가볼까?선택의 기로에서길을 걷다 보면 도중에 여러 개
마한유산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필자가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영암은 자연환경, 인문환경이 조화를 이룬 우리나라 대표적인 지역이다. 이러한 특성을 관광 자원화하여 지역발전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이때 지역이 지닌 정체성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트로트센터가 왜 영암에 있을까? 트로트 가수 1세대 대표인 하춘화가 왜 영암에서 태어났을까? 외지인들이 이러한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답해야 할까? 필자는 이렇게 얘기하겠다. “전통음악에 새로운 음악 장르가 더하여 나온 장르가 트로트이다. 영암을 마한의 심장이라고 하는 까닭은, 기존
대보름 당산제를 지낸 선돌녹암마을 입구에 선돌이 세워져 있듯이 오산마을에도 여러 기의 선돌이 있었다고 한다. 선돌은 고인돌과 더불어 선사시대의 거석 기념물의 하나로서 기둥 모양의 돌을 땅 위에 하나 이상 세워서 기념물이나 신앙 대상물로 삼은 것을 말한다. 선돌은 입석(立石, menhir), 돌꼬지, 도두, 석주(石柱) 등의 명칭이 있다. 돌을 세웠거나 서 있다는 뜻에서 선바위(立巖)라고도 한다. 선돌은 대체로 마을로 들어가는 어귀나 평지에 위치한다. 논밭 가운데나 고인돌 옆에 있는 경우도 있다. 선돌은 다산, 생명력, 장수를 바라는
필자는 ‘마한의 심장, 영암’이라는 주제로 글을 쓸 때나 특강을 할 때 ‘개방성’과 ‘포용성’을 영암의 정체성으로 내세운다. 이렇게 보는 근거의 하나로 현재 서울 숭실대 한국기독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거푸집’을 먼저 설명한다. 거푸집은 동(銅)으로 된 도구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틀로 용범(鎔范)이라고 예전의 교과서에 실려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 거푸집은 해방 후 전라남도 영암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1986년 3월 14일 국보 231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이 거푸집이 구매를 통해서 들어왔는데, 영암에서 출토되었다고
오산(蜈山)마을은 행정구역상 군서면 마산리에 속한다. 마산리(馬山里)는 동남으로 월곡리, 남서로는 성양리, 북으로는 해창리와 접경하고 있다. 마산리는 현재 오산을 1구, 신마산을 2구, 원마산과 낙안을 3구로 운영하고 있다. 오산리는 해발 98m에 이르는 성묘산을 주산으로 하고 남쪽으로 제법 너른 들을 경영하고 있다. 성묘산 정상에는 옛 봉화대가 있던 터가 남아 있다. 성균관 대사성에 있던 경주이씨(慶州李氏)인 이흔(李昕)이 1500년대에 월출산 도갑사 부근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다가 현재의 오산마을인 죽림동(竹林洞)에 터를 잡았다고
영도구의 도시재생 뉴딜사업부산 영도구는 일제강점기 해양수산업의 중심지이자 근대 조선 및 수리산업의 기지라는 역사·문화·산업적 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한때 이곳 항구에는 거대한 배와 기술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고 각종 화물이 모여드는 보세창고 옆에는 어묵, 두부 등 해양식품 제조업 상권이 발달했다. 조선업 등의 산업시설 폐쇄와 주변 부산시청사 이전 등으로 인구가 유출되면서 원도심 전통골목상권이 쇠퇴하고, 폐·공가가 급속히 늘어났다.2019년 행정안전부 자료에 따르면 영도구는 전국 광역시 도심 중 소멸 위험도에서 부산 동구, 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