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 역사는 한국고대사의 원류“마한은 기원전 2세기 이전부터 한반도 남부에 역사를 남겼다. 마한에서 변한, 진한이 갈라져 나왔고 마한 사람이 진한, 변한의 왕을 하였다. 마한 역사가 한반도 중남부의 역사인 셈이다. 북쪽에 고조선·부여가 있었다면 그 남쪽에 마한이 있었다. 마한의 역사는 6세기 중국 ‘양직공도’에서 확인되고 있다. 8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마한사가 한국고대사의 원류이자 본류임을 말해주고 있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할 때 마한·백제의 부활을 강조하였다. 마한 정체성이 9세기 말까지 이어졌음을 알려준다. 마한 역사를
용암사지 마애불, 9개 구멍의 실체용암사지 마애불 불두의 발제선(이마와 머리카락이 자라는 경계선)을 따라 수평으로 난 7개의 작은 구멍과 광배에 나 있는 동일한 직경의 두 구멍은 왜 뚫려있는 것일까? 마애불 불두를 확대한 아래 사진을 자세히 관찰해 보자.(사진출처: 문화재청)문화재 전문가들은 이 구멍들을 마애불의 머리에 보관(寶冠)을 덧씌웠던 흔적일 것으로 짐작한다. “도솔천은 보관(寶冠)·칠보(七寶)·광명(光明)·연화(蓮華) 등으로 장엄(莊嚴)(좋고 아름다운 것으로 국토를 꾸미고, 훌륭한 공덕을 쌓아 몸을 장식하고, 향이나 꽃
관련 지자체 함께 힘을 모아야최근에 우리 영암과 관련된 두 가지 이야기가 있어 간단히 소개하고 본론에 들어가고자 한다. 3월 중순 필자는 우리 지역 소장 학자들과 영암의 역사 유산을 답사하였다. 그들에게 영암 답사는 처음이다. 필자는 영암 이야기를 할 때 ‘마한의 심장, 영암’ ‘독립운동의 성지, 영암’과 ‘고대 한국의 제사 신앙이 깃든 영산(靈山), 월출산’의 경관을 함께 이야기한다. 영암처럼 인문환경과 자연환경이 오롯이 갖춘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답사에 동행한 미술사 전공학자는 시종 일대의 마한 고분군과 남해신사에서 바라본
용암사 마애불과 월곡리 마애불 어렵게 도착하여 친견한 월곡리 마애불을 보니 자연스럽게 구정봉 용암사지 마애불이 생각난다. 용암사 마애불은 이곳에서 직선거리로 2.5km 떨어져 있는데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국이다. 주민들 사이에 전해오는 설화에 따르면 동시에 그리기 시합을 했다고 하는데 전문가들 의견은 다르다. 용암사 마애불이 먼저고 월곡리 마애불은 그보다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마애석불(磨崖石佛)이란? 마애석불(마애불)은 말 그대로 ‘벼랑부처’란 뜻이다. 바위산에 석굴을 파서 승원을 짓거나 탑당을 세우는 일은
지난 3월 23일 전남의 한 지자체가 삼한시대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한역사 복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보도가 나왔다. 해당 지자체는 최근 전문가를 포함한 마한역사 복원 전담팀을 구성하고 마한 관련 문화자원을 통합·관리하고 개발·복원하는 로드맵을 마련했다고 한다. 전담팀에서는 산재한 유적 시굴·발굴 조사를 진행하는 한편 각종 문헌 고증과 마한 민속발굴, 국제학술대회 개최 등 마한사 복원과 역사 관광지 개발을 체계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국립마한센터 유치에도 본격적으로 나서겠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필자가
김광열 위원장은 체험관 마당에서 월출산을 가르키며 호동마을의 풍수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한다. “월출산은 내산(內山)과 외산(外山)으로 나누어집니다. 호동마을을 중심으로 놓고 본다면 범바우-시루봉-노적봉-죽정마을로 이어지는 능선이 내산에 속하고 천황봉-구정봉-미왕재로 이어지는 능선이 외산에 속합니다. 우리 호동마을은 호랑이 형상을 한 뒷산이 우람한 기상을 내뿜으며 마을을 지켜주고 있는 형국이지요. 저기 보이는 능선이 호랑이 등입니다. 그리고 노적봉 못 가서 우뚝 솟은 봉우리가 호랑이 머리에 해당합니다. 호랑이 꼬리는 마을을 길게 감싸
동해신사 중수기의 의미동해신사는 남해신사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 들어와 ‘동해묘’ ‘동해신묘’ 등의 명칭 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성리학적 질서가 강화되면서 그 격이 약화되고 있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중수(重修) 기록이 보이지 않은 남해신사와 달리 동해신사는 중수 기록이 보인다. 조선 경종 2년(1722년)과 영조 28년(1752년)에 양양 부사 채팽윤과 이성억이 각각 중수하였으며, 정조 24년(1800년)에는 어사 권준의 상주(上奏)와 강원도 관찰사 남공철의 주장으로 재차 중수되었으나, 순종 2년(1908년)에 일본의 민족문화
호동마을 전의성 이장과 김광열 추진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오전에 집을 나섰다. 약속시간 보다 좀 더 일찍 도착하여 골목길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이곳저곳을 자세히 둘러 보았다. 큰길에서 멀리 벗어나 차 소리가 없는 데다 풍광이 워낙 뛰어난 마을이어서 그런지 근사한 정원을 갖춘 전원주택이 여러 채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마을 골목길을 산책하고 있는데 길가에 세워진 작은 시비(詩碑) 하나가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읽어보니 속세를 떠나 사는 은자(隱者)의 풍모가 느껴지는 내용의 글이었다. 호동마을에 호랑이상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해신사와 더불어 강원도 양양의 동해신사, 황해도 풍천의 서해단을 3대 해신당으로 부르고 있다. 고려 초에 국가에서 제를 주관한 유일한 해신당은 남해신사였으나 고려 후기에 동해신사와 서해단 등 국가의 지원을 받는 해신당이 동·서 해안에 추가되었다. 남해신사는 1990년대 말 목포대 박물관이 발굴 조사하여 그 터가 확인되어 2000년대 들어서 복원이 되었으나 동해신사는 남해신사보다 약간 이른 1993년 복원되었다. 현재 복원된 동해신사는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 399번지에 석축을 쌓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정면 3칸, 측면 2칸,
영암읍 회의촌 마을부터 시작하여 ‘월출산 벚꽃 백 리 길’ 답사를 나선 지가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 다녀본 마을마다 그 나름의 특색과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월출산 천황봉과 기찬랜드, 악성 김창조와 국수 조훈현, 고인돌과 천제단까지 빼어난 자연환경과 기라성 같은 인물들, 그리고 선사시대의 유물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회의촌마을, 용암사 마애여래좌상과 구정봉에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녹거동(큰골)을 머리 위에 둔 녹암마을, 닭바위 전설과 효자 박응원을 추모하여 세운 아천정으로 이름난 주암마을, 지네바위와 칼바위 전설로
무궁무진한 스토리와 콘텐츠필자는 전라남도 용역으로 남도 미래유산을 발굴하여 보존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미래유산과 관련된 전라남도 조례가 제정되어 있지만, 미래유산은 아직 지정되지 않은 문화유산 가운데 근현대기에 해당하는 유무형 유산을 일컫는다. 이러한 기준에 맞는 영암의 미래유산은 무엇일까 고민하던 필자는 ‘양방매 생가터’를 주목하였다. 필자가 양방매 생가터를 주목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이다. 양방매는 청사에 빛나는 한말 의병 전쟁의 중심에 우뚝 선 여성의병이다. 그녀는 심남일과 함께 호남의소를 이끈 강무경의 아내로
솟을대문 앞에 있는 위인재기를 읽고 난 후에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날아갈 듯 처마를 펼친 팔작지붕의 4칸 한옥이 나그네를 반갑게 맞이한다. 찬찬히 살펴보니 위인재 건물 기둥에 총 12개의 주련이 걸려있다. 특이하게 정면 기둥뿐만 아니라 좌우 측면 기둥에도 주련이 걸려있다. 한문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친절하게도 토방 앞에 주련을 해석해놓은 설명판을 설치해 놓았다. 이렇게 집을 지은 동기를 밝히는 문장과 주련을 한글로 해석해놓은 문중을 찾아보기 힘들다. 천안전씨 문중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진다. 주련 한 구절 한 구절마다 위인재
현대사에 대한 관심도 가져야 필자는 지난 2월 23일 혁신 운동에 바탕을 둔 독립운동을 전개한 강석봉 선생 평전 출판회를 광주에서 열었다. 강석봉 선생과 교류한 인물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인물이 영암 출신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가운데 조극환 선생과 항일운동에서 평생 동지로 지냈다. 강석봉이 미군의 공습을 피해 영암 구림에 있는 조극환의 별장에서 상당 기간 머무른 것도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케 한다. 그런데 이번에 작업을 하면서 조극환 선생의 사진을 찾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마한사도 중요하지만, 현대사에 대한 관심도 이에 못지않게
호동마을은 벚나무 가로수 길에서 월출산 방향으로 쑥 들어가 있어서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마을 표지석을 지나 200여 m 정도 안길로 들어가면 보물처럼 숨겨진 마을이 그 전모를 드러낸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마을 한복판에 자리한 우람한 소나무 숲이다. 소나무 숲 왼편에는 정자가 한 채 서 있고, 오른편에는 솟을대문이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솟을대문 앞에 안내판이 한 개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호동마을 천안전씨 문각인 위인재기(爲仁齋記)를 한글로 풀어 음각해 놓은 해설판이다. 호동마을 이장 전의성 씨에 의하면 엄길마을이
나주에서 발견된 전방후원형 고분지난해 12월 3일 공사 중인 ‘광주–강진’ 간 고속도로 제5공구 건설 현장인 나주 봉황면 유곡리 일대에서 전방후원형 고분(일명 장고분)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되었다. 광주-강진 간 고속도로는 총연장 88.61㎞로 오는 2024년 목표로 공사가 한창이다. 나주시를 통과하는 18㎞ 구간 중 봉황면이 가장 많은 11㎞(60%)를 차지한다. 필자도 현장을 아직 가보지 않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다만, 보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농경지 한 가운데 솟아 있으며, 평범한 작은 동산처럼 보인다. 규모는 정
오산마을에 들렀다가 내친김에 오산로를 따라 원마산, 신덕정, 도리촌, 장사리, 목화정, 신흥, 원해창까지 다녀왔다. 이제 다시 원래 목적지인 월출산 벚꽃 백 리 길로 돌아와 가던 길을 가기로 한다. 월곡리 4구인 주암마을에서 남쪽으로 통하는 조그마한 언덕길을 넘어가면 시리봉 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이 하나 나온다. 이번에 답사할 호동마을이다. 주민들은 이 등성이를 범골잔등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이 등성이에 주막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이 작은 길은 주암마을과 호동마을 주민들만 주로 사용하고 있다. 외지인들이 호동마을을 가기 위
신흥마을에서 나와 서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월출산온천관광호텔이 바로 눈앞에 나타난다. 그곳을 지나면 곧바로 한국농어촌공사 군서양수장이 보인다. 군서양수장은 영산호 물을 농업용수로 공급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 양수장을 지나면 원해창 삼거리가 나온다. 남쪽으로 가면 신덕정이 나오고 북쪽으로 가면 해창교를 지나 도포로 이어진다. 이 삼거리를 중심으로 30여호의 민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여기가 바로 해창리 2구인 원해창마을이다. 원래 영암군 서시면(西始面)의 지역이었으며, 조세 창고가 있는 관계로 창말, 창촌, 해창이라 불렸다. 19
▣ 모든 군민에게 위로와 희망을영암군은 대망의 임인년 새해를 맞아 사상 유례없는 코로나19로 온 국민이 힘든 한 해를 보내고 경기침체와 50년 만의 한파와 폭설, 폭염, 저온 피해 등 어느 해보다 큰 고통과 시름을 겪어 오신 군민들께 신년사를 통해 위로와 격려를 보냈다.또한 코로나19의 확산에 따라 올 설 명절에도 비대면 명절을 맞이해야 하는 엄중한 시기임을 감안할 때 군은 고향과 친지들을 찾지 못하는 16만 향우를 대신해 어르신들과 취약계층의 안부를 직접 살피고 다양한 복지 시책들을 통해 이번 설 명절에 소외받는 군민이 없도록 각
4세기 후반 마한이 백제에 복속되었다는 통설을 반박하는 연구 성과들이 적지 않다. 이를테면 나주 반남 고분군과 복암리 고분군, 영암 시종 고분군 등에서 금동관, 금동신발, 환두대도, 대형 옹관 등 백제와 무관한 독자적 연맹체를 입증하는 유물들이 많다. 특히 6세기 초 백제 사신의 행차를 글과 그림으로 수록한 양직공도에서 마한의 왕국들이 전남 여러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영산강 유역의 마한 정치체들이 축적한 여러 유산을 통해 마한 사회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김영미 교수는 마한의 3대 정신으로 ‘평화·분권·개방’을 들었다. 김 교
목화정마을에서 북쪽으로 조그마한 재를 하나 넘으면 언덕을 등지고 수십 채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해창리 4구 신흥마을이다. 아침부터 눈이 내리고 기온이 뚝 떨어져서 그런지 동네 골목에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 마을 한복판에 태극기가 펄럭이는 회관이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마을회관 바로 앞에는 신흥마을의 지명유래가 간략하게 새겨진 준공기념비가 세워져 있다.“1900년대에 이루어진 작은 동리(洞里)로 원래는 바다에 기어 다니는 게의 형상이라 하여 게등(嶝)(일명 기등)이라 하다가 마을 이름을 새로 번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