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무얼까. 월출산, 무화과, 한우, 대불국가산업단지…. 영암군을 대표하는 콘텐츠 목록에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민속씨름단이다. 명절이면 무심코 리모콘으로 TV 채널을 여기저기 돌리다가 우연히 만났을 수도 있는 이름이지만, 이젠 ‘영암군민속씨름단(감독 김기태)’이 먼저 떠오른다. 1980~90년대 민속씨름은 이만기·강호동 등 슈퍼스타를 배출하면서 큰 사랑을 받았다. 이후 긴 침체기를 겪다가 최근 다시 관심을 받으며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2017년 무형문화재 제131호 지정, 201
관광객을 유혹하는 ‘킬러 콘텐츠’‘월출산 벚꽃 백 리 길’에 벚꽃이 지자 유채꽃이 바로 그 뒤를 이어 흐드러지게 피었다. 구림마을의 4월은 벚꽃 향기와 유채꽃 향기로 가득하다. 군서면 주암과 오산에서 월산과 평리를 거쳐 구림마을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들녘에 샛노란 유채꽃 물결이 장관을 이룬다. 벚나무 가로길과 조화를 이루어 그 아름다움이 더욱 돋보이는 ‘월출산 벚꽃 길’이다. 그러나 이를 활용하여 관광객의 발걸음을 구림마을 골목길 구석구석으로 이끌어 들일 콘텐츠는 턱없이 부족하다. 구림의 역사와 문화, 아름다운 풍경을 제대로 알릴 수
▲먼저, 당선 소감은?경제 폭망 등 무능한 정권을 강력히 심판하고 인구소멸 위기와 지역발전을 위해 더욱 힘쓰라는 군민 여러분의 준엄한 명령과 성원에 감사와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민주, 민생 등 각종 위기를 극복하고 특히 어려운 농어촌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배전의 노력을 더 기울이겠습니다. 나아가 민주당이 수권정당으로 발돋움하고 분단된 한반도 통일의 기운을 드높이는 역할도 감당하고자 합니다.▲호남지역 민주당 현역 의원 교체비율이 높았다. 그럼에도 경선에서 최종 후보로 선출됐고, 본선에서 최종 승리했다. 그 원동력은?저는 국회의원
회사정기를 쓴 임호는 구림 대동계 창설 취지와 내용을 담은 ‘구림동 중수계 서’(鳩林洞中修契序)를 남겼다. 당시 동장(洞長)은 박규정이었는데 그는 오한공 박성건의 손자다. 다음은 임호가 구림동계를 중수하며 쓴 서문의 전문이다.구림동 중수계 서(鳩林洞中修契序)구림은 역사가 오래된 동리이다. 신라말부터 동리 이름을 구림이라 하였는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7~8백년 동안 흥폐(興廢)와 성쇠에 기복이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실은 잠시 제쳐두고 전해 듣거나 직접 본 것을 말하건대, 외선조 박빈(朴彬)이 처음으로 이곳에 자리 잡고 살기 시
임구령의 장남 남호처사 임호월당 임구령은 처가 동네인 구림에 자리를 잡으면서 서호정 국사암 앞에 요월당을, 모정리 연못가에 쌍취정을 각각 지어 거처를 마련하고, 양장 원머리와 동호리를 잇는 진남제를 구축하여 천 두락에 이르는 간척지를 조성하였다. 이것은 당시 영암 사회에서도 획기적인 일이었는데 선산 임씨가 경제적 기반을 확보함과 동시에 구림을 중심으로 한 향촌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일이었다. 임구령은 슬하에 임호, 임혼(林渾), 임완 세 아들과 세 딸을 두었는데 이 중에서 차녀를 해주인 최경창에게 출가시켰다. 임혼은 1553년(
‘호남삼고’로 추앙받은 석천 임억령쌍취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임구령의 중형인 임억령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구림지역에서 장기간 거주한 것은 아니었지만, 동생인 임구령의 집인 요월당에 잠시 머무르면서 요월당과 쌍취정에 관한 시를 남겼고 이것은 구림마을을 다녀간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문곡 김수항이 담양에서 석천이 지은 쌍취정에 관한 시를 필사하여 후세에 남긴 것이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석천 임억령(1496~1568)은 둔암 안축, 하서 김인후와 함께 ‘세상을 초탈하여 한적하게 노닐었다’ 하여 사람들에 의해 ‘호남삼
지난해 모금액 전국 2위 성과영암군은 지난해 목표액 6억 원의 두 배가 넘는 12억3천600만 원을 모금했다. 전국 기초지자체 중 2위에 해당하는 성과였다. 답례품으로 영암군의 농산물과 소상공인 상품이 3억7천800만 원 넘는 매출을 올렸다. 고향사랑기부제가 농가소득 증대와 지역경제 활성화에 톡톡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영암군에서 확인됐다. 지역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인 영암군민속씨름단, F1자동차경주장을 활용한 영암군의 답례품 아이디어도 빛났다. ‘천하장사 식사권’ ‘F1자동차경주장 서킷 체험권’은 참신성과 희소성으로 전국의 이목을
이하곤의 월출산과 구림마을충청도 선비 담헌 이하곤(1677~1724)은 강진에 귀양 가 있던 장인 송상기를 만나기 위해 남도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농암 김창협에게 글을 배워 아마도 영암 월출산과 구림마을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1722년 10월13일부터 12월18일까지 전라도 지역을 유람하고 다수의 시와 산문을 남겼다. 사후에 후손들이 그의 원고를 정리하여 ‘두타초(頭陀草)’라는 이름의 문집을 간행했다. 두타초는 저자 이하곤이 살던 두타산(頭陀山)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며, 초(草)라는 이름은 아직
2024 왕인문화축제가 3월 28일(목) 개막한다. 올해도 31일(일)까지 나흘간 ‘시공초월 : 왕인의 문화, 빛이 되다’을 주제로 왕인박사유적지에서 상대포와 구림마을 일원에서 펼쳐진다. 영암군과 영암문화관광재단은 2024~25 대한민국 문화관광축제 및 2024 전라남도 우수축제 선정을 계기로 최근 축제 트렌드에 맞는 프로그램을 반영하고 인물에서 인문으로 변화해가는 콘텐츠 축제로 변화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개막행사 개막행사는 28일 오후 6시 30분 주무대에서 열린다. 식전공연과 왕인상 시상식 그리고 개막 세레모
평일 오전, 11시 10분부터 아파트 1층에 줄이 섰다. 30대 청년에서 70대 어르신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행렬이었다. 대도시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이채로운 광경이 영암읍 고령자복지주택(영암남풍 LH 2단지) 후생복지관에서 벌어진 이유는 뭘까. 시계가 11시 30분을 가리키자, “입장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차례로 실내로 들어섰다. 갓 지어낸 밥과 따끈한 국과 스프가 김을 뿜어내는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리가 차서 식당 밖 대기 줄에서 잠시 기다려야 하는 이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60석의
400년 만에 극적으로 만난 쌍취정기2014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전날 밤에 머리가 허연 네 분 신선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는 꿈을 꾸다가 깨었다. 아내에게 그 내용을 전하면서 무슨 일이 있으려고 그런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오전 일을 끝내고 월인당 누마루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승용차 한 대가 집 앞에 멈춰 서더니 어른들 네 분이 차에서 내렸다. 꿈에서 본 것처럼 백발이 성성한 도인의 풍모를 갖춘 어른들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냐고 여쭸더니 한 분이 점잖게 물었다. “여기에 무슨 방죽이 있습니까?” “제가 살고
심의철 군수 선정비원머리는 양장마을에 속하는 지역이다. 임구령 목사는 이 원머리에서 동호리까지 제방을 쌓아 지남들을 만들었다. 바로 오중스님의 살신성인 전설이 깃든 진남제이다. 450년 전 당시에는 흙으로 된 토방이었다. 그러다 보니 홍수가 지면 흙이 유실되어 둑이 무너지거나 넘치는 일이 많았다. 동호, 모정, 양장마을 주민들은 장마철이 되면 늘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원머리에서 살았던 고 최석준 옹은 2009년 필자와 대담 중에 다음과 같은 증언을 했다. “옛날에는 모정, 동호, 양장에 사는 주민들이 제방을 3등분해서 울력을
낭산 김준연! 그는 평생을 항일, 반공, 반독재 투쟁으로 일관하였다. 별세할 때는 본인 소유의 집 한 채 없었으며 소유품이라고는 책과 회중시계 1개, 주머니에 동전 몇 개가 전부일 정도로 청렴하고 강직하며 정의롭게 살았다. 낭산 김준연 일대기 관련 문헌(文獻) 낭산 관련 문헌으로는 낭산 자신이 쓴 자서전과 타인이 쓴 단행본 책 및 논문 몇 편이 있다. 자신이 쓴 단행본 책으로는 독립노선(1948), 나의 소전 (1958), 나의 길(1966), 나의 편력(1968)이 있으며, 타인이 쓴 단행본 책으로는 허도산의 건국의 원훈 낭산 김
월당 임구령과 진남제 조선 시대 1534년경 광주목사와 남원부사를 지낸 월당 임구령(1601~1562)이 영암 구림에 와서 여생을 마치기로 하고 서호정 국사암 곁에 요월당이라는 집을 짓고 살았다. 선산인 임구령은 난포박씨의 사위로 박빈의 증손인 박세간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로 인하여 처가 동네인 구림에 거처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월당 임구령을 필두로 한 선산임씨의 구림 입촌은 구림마을에 큰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선산임씨는 구림 국사암 곁에 요월당을 짓고, 십리평야가 잘 보이는 모정리 연못가에 쌍취정을 지어 시인묵객들과 함께
구암거사 명문국사암 상단 옆면에 ‘龜岩居士 林湖之閭 隆慶五年’(구암거사 임호지려 융경오년)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융경 5년은 1572년을 말한다. 임구령의 장남 임호는 사옹원직장으로 근무하고 있다가 1562년 11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영암에 내려와 시묘살이를 했다. 그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구림마을 국사암(구암) 곁 요월당에 거처하면서 고향마을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국사암 곁에 세워졌던 요월당(邀月堂)월당공 임구령(1501~1562)은 36세이던 중종 31년(1536) 국사암 곁에 요월당을 건립하였고, 40세이던 1
█ 새해 군정 역점 시책은우승희 군수는 신년사에서 “2024년은 ‘혁신 영암’이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책임감과 자신감으로 열심히 뛰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청년 활력’ ‘지역순환경제’ ‘달빛생태’ ‘에너지 전환’ ‘미래첨단농업’ 5개 키워드로 올해 영암군 혁신의 내실을 기하기로 했다. 갑진년 새해, ‘더 크고 더 젊게 미래로 도약하는 도시’를 지향하는 영암군의 군정 계획을 세부적으로 살펴봤다. ▣ ‘청년 활력’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영암군은 지역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청년 활력을 천명했다. 나아가 청년활력
평생 국사암을 벗한 태호공 조행립태호공 조행립은 국사암(國師庵) 앞쪽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 바위를 유난히 아끼고 사랑했다. 집에 손님이 올 경우, 그는 거북 바위(구암, 국사암)를 청소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했으며, 시시때때로 거북 바위에 오르거나 앉아서 명상에 잠기곤 했다. 그가 남긴 시 속에는 국사암, 사암, 구암이라는 단어가 수십 차례나 등장한다. 국사암은 아마도 그에게 시적 영감을 가져다주는 특별한 장소였던 것 같다.조행립은 82세가 되던 해에 ‘사암유거(師庵幽居)’(사암에서 한가하게 살다)라는 제목으로 6수의 연작시를
도선 발자취 따라 구림마을 한 바퀴도선국사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구림마을 여기저기에 산재한 도선 관련 유물·유적을 만날 수 있다. 도선 어머니 최 씨 처녀가 빨래하다 물에 떠내려온 오이를 먹었던 장소인 ‘조암(槽巖)’, 도선국사 탄생지 ‘최씨원’, 아기 도선을 버린 바위 ‘국사암’, 도선이 어린 나이에 출가해서 살았다는 ‘문수암’, 도선이 창건했다는 ‘도갑사’, 도갑사에 세워진 ‘도선국사비문’,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가던 중 옷을 걸어 놓았다는 ‘백의암’, 바위에 버려진 아기 도선을 보호하러 비둘기가 날아간 ‘비죽’ 등 도선국사와
세월 따라 상전벽해가 되다지도를 보면 바닷물이 월출산 기슭 아래까지 깊숙이 밀려 들어와 철썩거렸음을 알 수 있다. 영암읍과 덕진면 영보리도 바닷가 마을이었다. 삼국시대를 지나면서 마을 주변 갯벌은 조금씩 조금씩 간척사업을 통하여 논으로 변해갔다. 구림마을 주변 역시 세월을 거치면서 상전벽해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서호 입구에는 남해와 서해로 이어지는 번창한 포구였던 상대포가 있었고, 주지봉 아래에는 도선국사 탄생지인 성기동 최씨원과 조암(빨래터)이 자리했다. 1657년 태호공 조행립에 의해서 성기동에 세워진 성기서재는 1684년에
1. 머리말천년의 모진 비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지켜온 영암! 월출산과 함께 신라말부터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찬연(燦然)한 영암! 영암이 어떤 세운(世運)이 몰아치기에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소멸지역에 해당된다는 말인가. 현대를 살아가는 영암인은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문제를 풀어가는 데는 영암의 현실을 직시하는 혜안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풍부한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이 있다. 이것이 영암의 난제를 풀어가는 밑천이요 자본이다. 이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지혜와 안목을 가지고 개혁을 뛰어넘어 혁신의 자세로 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