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삼고’로 추앙받은 석천 임억령쌍취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임구령의 중형인 임억령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구림지역에서 장기간 거주한 것은 아니었지만, 동생인 임구령의 집인 요월당에 잠시 머무르면서 요월당과 쌍취정에 관한 시를 남겼고 이것은 구림마을을 다녀간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문곡 김수항이 담양에서 석천이 지은 쌍취정에 관한 시를 필사하여 후세에 남긴 것이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석천 임억령(1496~1568)은 둔암 안축, 하서 김인후와 함께 ‘세상을 초탈하여 한적하게 노닐었다’ 하여 사람들에 의해 ‘호남삼
지난해 모금액 전국 2위 성과영암군은 지난해 목표액 6억 원의 두 배가 넘는 12억3천600만 원을 모금했다. 전국 기초지자체 중 2위에 해당하는 성과였다. 답례품으로 영암군의 농산물과 소상공인 상품이 3억7천800만 원 넘는 매출을 올렸다. 고향사랑기부제가 농가소득 증대와 지역경제 활성화에 톡톡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영암군에서 확인됐다. 지역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인 영암군민속씨름단, F1자동차경주장을 활용한 영암군의 답례품 아이디어도 빛났다. ‘천하장사 식사권’ ‘F1자동차경주장 서킷 체험권’은 참신성과 희소성으로 전국의 이목을
이하곤의 월출산과 구림마을충청도 선비 담헌 이하곤(1677~1724)은 강진에 귀양 가 있던 장인 송상기를 만나기 위해 남도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농암 김창협에게 글을 배워 아마도 영암 월출산과 구림마을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1722년 10월13일부터 12월18일까지 전라도 지역을 유람하고 다수의 시와 산문을 남겼다. 사후에 후손들이 그의 원고를 정리하여 ‘두타초(頭陀草)’라는 이름의 문집을 간행했다. 두타초는 저자 이하곤이 살던 두타산(頭陀山)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며, 초(草)라는 이름은 아직
2024 왕인문화축제가 3월 28일(목) 개막한다. 올해도 31일(일)까지 나흘간 ‘시공초월 : 왕인의 문화, 빛이 되다’을 주제로 왕인박사유적지에서 상대포와 구림마을 일원에서 펼쳐진다. 영암군과 영암문화관광재단은 2024~25 대한민국 문화관광축제 및 2024 전라남도 우수축제 선정을 계기로 최근 축제 트렌드에 맞는 프로그램을 반영하고 인물에서 인문으로 변화해가는 콘텐츠 축제로 변화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개막행사 개막행사는 28일 오후 6시 30분 주무대에서 열린다. 식전공연과 왕인상 시상식 그리고 개막 세레모
평일 오전, 11시 10분부터 아파트 1층에 줄이 섰다. 30대 청년에서 70대 어르신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행렬이었다. 대도시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이채로운 광경이 영암읍 고령자복지주택(영암남풍 LH 2단지) 후생복지관에서 벌어진 이유는 뭘까. 시계가 11시 30분을 가리키자, “입장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차례로 실내로 들어섰다. 갓 지어낸 밥과 따끈한 국과 스프가 김을 뿜어내는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리가 차서 식당 밖 대기 줄에서 잠시 기다려야 하는 이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60석의
400년 만에 극적으로 만난 쌍취정기2014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전날 밤에 머리가 허연 네 분 신선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는 꿈을 꾸다가 깨었다. 아내에게 그 내용을 전하면서 무슨 일이 있으려고 그런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오전 일을 끝내고 월인당 누마루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승용차 한 대가 집 앞에 멈춰 서더니 어른들 네 분이 차에서 내렸다. 꿈에서 본 것처럼 백발이 성성한 도인의 풍모를 갖춘 어른들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냐고 여쭸더니 한 분이 점잖게 물었다. “여기에 무슨 방죽이 있습니까?” “제가 살고
심의철 군수 선정비원머리는 양장마을에 속하는 지역이다. 임구령 목사는 이 원머리에서 동호리까지 제방을 쌓아 지남들을 만들었다. 바로 오중스님의 살신성인 전설이 깃든 진남제이다. 450년 전 당시에는 흙으로 된 토방이었다. 그러다 보니 홍수가 지면 흙이 유실되어 둑이 무너지거나 넘치는 일이 많았다. 동호, 모정, 양장마을 주민들은 장마철이 되면 늘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원머리에서 살았던 고 최석준 옹은 2009년 필자와 대담 중에 다음과 같은 증언을 했다. “옛날에는 모정, 동호, 양장에 사는 주민들이 제방을 3등분해서 울력을
낭산 김준연! 그는 평생을 항일, 반공, 반독재 투쟁으로 일관하였다. 별세할 때는 본인 소유의 집 한 채 없었으며 소유품이라고는 책과 회중시계 1개, 주머니에 동전 몇 개가 전부일 정도로 청렴하고 강직하며 정의롭게 살았다. 낭산 김준연 일대기 관련 문헌(文獻) 낭산 관련 문헌으로는 낭산 자신이 쓴 자서전과 타인이 쓴 단행본 책 및 논문 몇 편이 있다. 자신이 쓴 단행본 책으로는 독립노선(1948), 나의 소전 (1958), 나의 길(1966), 나의 편력(1968)이 있으며, 타인이 쓴 단행본 책으로는 허도산의 건국의 원훈 낭산 김
월당 임구령과 진남제 조선 시대 1534년경 광주목사와 남원부사를 지낸 월당 임구령(1601~1562)이 영암 구림에 와서 여생을 마치기로 하고 서호정 국사암 곁에 요월당이라는 집을 짓고 살았다. 선산인 임구령은 난포박씨의 사위로 박빈의 증손인 박세간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로 인하여 처가 동네인 구림에 거처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월당 임구령을 필두로 한 선산임씨의 구림 입촌은 구림마을에 큰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선산임씨는 구림 국사암 곁에 요월당을 짓고, 십리평야가 잘 보이는 모정리 연못가에 쌍취정을 지어 시인묵객들과 함께
일제는 김준연을 그의 대학 재학시절부터 요시찰대상 인물 갑호(甲號)로 지정하여 감시하다가, 제3차 공산당 사건으로 7년간 투옥(投獄)시켰고, 9년간 가택연금 시켰다. 최종에는 학살대상자로 지목, 그 집행 기일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이러한 중에도 김준연은 단파방송을 청취하여 일본의 패망이 멀지 않았다는 전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패망이 임박하자 고하 송진우에 이어 김준연에게 치안권 이양 수락을 요청했으나 이를 거절하였다.1945년 조국의 해방 해방의 기쁨은 잠시뿐,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그어 점령군 자격으로 한반도
구암거사 명문국사암 상단 옆면에 ‘龜岩居士 林湖之閭 隆慶五年’(구암거사 임호지려 융경오년)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융경 5년은 1572년을 말한다. 임구령의 장남 임호는 사옹원직장으로 근무하고 있다가 1562년 11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영암에 내려와 시묘살이를 했다. 그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구림마을 국사암(구암) 곁 요월당에 거처하면서 고향마을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국사암 곁에 세워졌던 요월당(邀月堂)월당공 임구령(1501~1562)은 36세이던 중종 31년(1536) 국사암 곁에 요월당을 건립하였고, 40세이던 1
(2) 낭산 김준연과 그의 시대낭산이 걸어온 길우리가 낭산 김준연 선생을 추모하는 것은 그가 동경제국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수학한 학벌과 법무부 장관에 5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훌륭한 학벌과 경력 때문만이 아니다. 선생은 10여 년간의 외국 유학 생활을 거치면서 민족의식을 정립하여 민족의 독립을 위해 민족 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의 가시밭길을 자초하였다. 해방정국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이 나라에 구축하기 위해 반공 투쟁을 하였으며, 우리의 신생 정부가 수립되면서는 국가의 초석을 다지는데 크게 헌신하였다. 그런가 하면, 박정희 군부와는 자
█ 새해 군정 역점 시책은우승희 군수는 신년사에서 “2024년은 ‘혁신 영암’이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책임감과 자신감으로 열심히 뛰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청년 활력’ ‘지역순환경제’ ‘달빛생태’ ‘에너지 전환’ ‘미래첨단농업’ 5개 키워드로 올해 영암군 혁신의 내실을 기하기로 했다. 갑진년 새해, ‘더 크고 더 젊게 미래로 도약하는 도시’를 지향하는 영암군의 군정 계획을 세부적으로 살펴봤다. ▣ ‘청년 활력’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영암군은 지역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청년 활력을 천명했다. 나아가 청년활력
평생 국사암을 벗한 태호공 조행립태호공 조행립은 국사암(國師庵) 앞쪽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 바위를 유난히 아끼고 사랑했다. 집에 손님이 올 경우, 그는 거북 바위(구암, 국사암)를 청소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했으며, 시시때때로 거북 바위에 오르거나 앉아서 명상에 잠기곤 했다. 그가 남긴 시 속에는 국사암, 사암, 구암이라는 단어가 수십 차례나 등장한다. 국사암은 아마도 그에게 시적 영감을 가져다주는 특별한 장소였던 것 같다.조행립은 82세가 되던 해에 ‘사암유거(師庵幽居)’(사암에서 한가하게 살다)라는 제목으로 6수의 연작시를
박평남은 무기가 빈약하고 훈련이 전무하였기 때문에 우선 신예교에게 훈련을 책임지게 하고 박평남 자신은 무기를 매입하기 위하여 나주 박민수 대장 휘하 의병감으로 있으면서 헌병 보조원 김현규· 최경심과 일인 다나가와 밀통하여 왜총 100자루를 매입, 영암에 보내 왔다.(영산포 헌병소에서 밀매) 이후 이를 근거로 여러 간행물에서 인용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1. 1991년 재경영암향우회에서 창간호로 발간한 誌에 신희범(국사편찬위원회 항일투쟁사 의병 편 전문위원)이
도선 발자취 따라 구림마을 한 바퀴도선국사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구림마을 여기저기에 산재한 도선 관련 유물·유적을 만날 수 있다. 도선 어머니 최 씨 처녀가 빨래하다 물에 떠내려온 오이를 먹었던 장소인 ‘조암(槽巖)’, 도선국사 탄생지 ‘최씨원’, 아기 도선을 버린 바위 ‘국사암’, 도선이 어린 나이에 출가해서 살았다는 ‘문수암’, 도선이 창건했다는 ‘도갑사’, 도갑사에 세워진 ‘도선국사비문’,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가던 중 옷을 걸어 놓았다는 ‘백의암’, 바위에 버려진 아기 도선을 보호하러 비둘기가 날아간 ‘비죽’ 등 도선국사와
전편 에 이어서여러 장수가 이 소식을 듣고 와 모였기로 나는 여러 사람에게 말했다. 적의 세력이 점점 치열하여 감히 포악을 부리니 그 세력을 막아 낼 수가 없은 즉, 여러 진이 모두 모여 적을 유도해 끌어내어 서로 어울려 승부를 결단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만약 숨고 도망하여 각자도생한다면 이 어찌 대장부가 나라 위해 충성을 바치려는 뜻이겠는가, 어찌 이웃 나라에 알릴 수 있는 일이겠느냐”일변으로는 영산포에 보발을 보내어 적의 마음을 격동하고, 일변으로는 여러 진의 책임자에게 통고하였다. 그래서 북쪽의 전수용 이대
불과 8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바닷물이 상대포까지 밀려 들어왔고 구림은 바닷가 마을이었다. 1,200여 년 전 주지봉 아래 성기동 최씨원에서 도선국사가 태어나 숱한 전설과 일화를 남긴 후 이 마을은 ‘쌍와촌’에서 ‘구림(鳩林)’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그 중심에 국사암이 있다. 국사암을 중심으로 남송정, 북송정, 동계리, 서호정 마을이 자리한다. 국사암은 영암도기박물관 정문에서 북쪽으로 약 100여 m 거리에 있다. 낭주최씨 문각인 덕성당과 고려태사 민휴공 최지몽 선생을 모신 사당 ‘국암사’가 바로 곁에 있다. 구림마을을 방문한
3. 영암 근·현대사의 오류사례영국의 역사학자 E·H Carr(1892-1982)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들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정의하면서, 역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일관된 연관성을 확립할 때에만 의미와 객관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E·H Carr가 정의하고 부연한 것처럼 역사는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로, 여기에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일관된 연관성을 확립할 때에만 그 의미와 객관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암에 내려오는 잘못된 오류의 역사를
세월 따라 상전벽해가 되다지도를 보면 바닷물이 월출산 기슭 아래까지 깊숙이 밀려 들어와 철썩거렸음을 알 수 있다. 영암읍과 덕진면 영보리도 바닷가 마을이었다. 삼국시대를 지나면서 마을 주변 갯벌은 조금씩 조금씩 간척사업을 통하여 논으로 변해갔다. 구림마을 주변 역시 세월을 거치면서 상전벽해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서호 입구에는 남해와 서해로 이어지는 번창한 포구였던 상대포가 있었고, 주지봉 아래에는 도선국사 탄생지인 성기동 최씨원과 조암(빨래터)이 자리했다. 1657년 태호공 조행립에 의해서 성기동에 세워진 성기서재는 1684년에